송나라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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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송나라에 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송나라

●역사

●송나라의 관제

●사회

●경제

●문화

●고려와 송나라

본문내용

청하여 군사를 발하였으나 역시 패하여, 요는 이로부터 더욱 고려와 송의 연합적 동태를 주시하면서 고려의 서북면(西北面:평북)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제1차 침략을 받은 고려는 거란과 강화를 맺고 994년부터 요의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이 해 6월에 성종은 요에 보복코자 사신을 송에 보내 원병을 청하였으나 출병을 거부하자 30년 만에 국교를 단절하였다. 목종(穆宗)이 즉위한 뒤 999년(목종 2)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이후 양국은 소극적이나마 교류를 하였으나 고려는 송을 거란 배후 견제세력으로 이용하려 한 것에 대해 송은 고려 ·요와의 문제에 개입을 회피하고 중립을 견지하였다.
거란의 제2차 침략(1010)을 거쳐 제3차 침략(1018)을 받은 고려는 거란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요의 압력에 따라 목종 이래 재개하였던 송과의 국교를 다시 단절하였다. 그러나 국교의 단절에도 여상(麗商)과 송상(宋商)에 의한 무역거래는 활발하여, 특히 송나라 상인들의 빈번한 내왕은 고려에 세계의 이질적인 문화요소를 전달하여 주었는데, 이 당시 아랍[大食國] 상인이 수삼차 고려에 내왕할 수 있었던 것도 송상의 중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송나라에서는 신종(神宗)이 즉위(1067)하면서 연려대요책(聯麗對遼策)이 대두되어 고려에 국교재개를 요구하여 왔고 고려에서는 송나라의 문화를 깊이 흠모하였던 문종(文宗)이 즉위한 뒤 매우 친송적(親宋的)이어서 1071년 양국은 약 반세기 동안 단절하였던 국교를 다시 텄다. 양국의 국교는 서로 요나라의 자극을 꺼려야 하는 입장이어서 정치 ·군사적인 관계보다는 경제 ·문화적인 측면으로 기울었으나, 이 또한 요나라의 이목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왕래하는 항로도 동로(東路)에서 서로(西路)로 변경하여야 할 정도였다.
여하튼 양국의 무역거래는 1078년 송나라에서 새로 건조한 거선 2척에 막대한 예물을 싣고 고려에 보낸 이래 절정기를 맞았다. 당시 송은 무역장려책과 더불어 고려에 친선책을 써서 고려사신과 고려상인에 대하여는 극진한 우대를 하여 이들이 통과하는 연로(沿路)에는 고려관을 세워 숙식을 제공하였다.
고려에서는 예성강(禮成江)∼자연도(紫燕島:仁川)∼마도(馬島:海美)∼고군산(古群山)∼죽도(竹島)∼혹산도(黑山島)∼중국 명주(明州:浙江省密波府)에 이르는 항로를 송선이 오고갈 때 관리를 항구에 보내 이를 영송(迎送)케 하였다. 또한 야간에는 송선이 통과하는 항로 연변의 산정(山頂)에 순차로 봉화를 올려 예성강까지 인도하는 등 접대에 정성을 다하였다.
고려와 송나라는 이와 같이 국교의 단속(斷續)에 구애됨이 없이 공사무역(公私貿易)을 통해 막대한 수량의 물물을 교류하였는데, 특히 고려는 송나라의 서적을 수집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여, 국초 이래 구경(九經)을 비롯하여 제자서(諸子書) ·사서(史書) ·역서(曆書) ·형법서(刑法書) ·의서(醫書) ·도가서(道家書) ·불서(佛書) 등 광범위하게 수입해서 이를 재소화(再消化)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아 문화적인 부(富)를 축적하였다.
또한 송의 사악(詞樂)이 들어와 고려에서 송악(宋樂)이 떨쳤고, 1116년(예종 11)에는 휘종(徽宗)이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보내와 이로부터 우리의 음악은 종래의 향악 ·당악에 아악이 새로운 음악으로 첨가되어 국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요의 동태를 주시하며 국교관계를 유지한 고려와 송은 1115년(예종 15), 요군을 격파하고 쑹화강[松花江] 이동의 땅을 장악한 여진 완안부(完顔部)의 아구타[阿骨打]가 황제를 칭하고 금국(金國)을 세움으로써 다시 그 관계는 흔들리게 되었다.
금나라가 일어나자 송은 금과 연합해서 1125년 요를 멸망케 하였으나 2년 후에는 송나라 자신도 금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휘종 ·흠종이 납치되어 북송시대는 막을 내리고(靖康의 變) 임안(臨安:杭州)의 남송시대가 열린다. 이를 전후해서 송은 고려에 자국의 위급을 알리고 금을 협공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금에 사대정책(事大政策)을 결정한 고려는 이를 거절하여 양국의 관계는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
송나라는 1142년 금에 세공을 바치고 신(臣)을 칭하게 되었고, 이후 고려도 주로 금나라와의 외교에 주력하게 되었다. 고려와 송나라가 주로 문화적인 교류를 하면서 서로 많은 귀화인을 맞이하여 고려에서는 이들에게 벼슬을 주어 우대하였는데, 이 중에는 문예 ·음률로써 이름을 떨친 사람도 많고, 남송이 멸망할 무렵에는 많은 송나라 사람이 고려에 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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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0.01.06
  • 저작시기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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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71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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