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운동, 촛불시위, 그리고 한국사회의 미래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68운동, 촛불시위, 그리고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 사회운동의 인식과 등장

●본론 - 68운동의 성격 및 배경, 그리고 국내상황의 분석 및 촛불시위의 등장

◎서유럽의 68운동의 성격과 배경

◂반체제 운동의 확산

◂반파시즘 운동

◂가부장적 기성질서에 대한 저항운동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운동

◂교육에서의 탈권위주의 운동

◎미국의 68운동의 배경과 성격

◎한국의 현 상황

◂정치 경제적 상황

◂사회적 동향

◎68운동의 배경과 국내 현 상황과의 비교분석 - 촛불시위의 필연적 등장

●결론 - 68운동이 주는 시사점과 앞으로 한국사회에 펼쳐질 사회운동의 방향성

본문내용

또한 촛불시위나 언론탑압에 대한 사회운동의 경우도, 자연법에 기초하지는 않더라고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소통과 참여의 문제는 그것들의 가치보다 더 낮다고 단언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소통과 참여의 의식을 말살시키고 탄압하려는 움직임이 더욱더 부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언론탄압 반발에 관한 사회운동과 촛불시위로 대변되는 참여와 소통의 문제에 범국민적인 관심과 지지를 얻는 것이다. 이처럼 개별적인 몇몇의 움직임이 사회적 움직임으로 발전하고 확산될 때 얻어야 할 당위성을 비유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호기심을 충족하면서도 파멸에 이르지 않는 절묘한 선택, 즉 호기심을 ‘사회운동’이라는 단어로 환치시켜보자면 그 뜻이 분명해 진다. 변동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이 조직화되어 어느 한 움직임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저지시키는 것은 갈등에 대한 투덜거림, 즉 ‘자폐증’으로 내부적으로 곪게 되어 스스로를 유리화시키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고, 반대로 그것에 대해 아무런 비판의식없이 동조하거나 순응한다면 결국 어느 지점에 이르러 불일치를 이루게 돼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더욱 심화시키는 이른바 ‘파멸’로 이끈다는 해석이 가능해 진다. 사실, 이 오디세우스의 귀향이라는 테마는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텍스트 읽기가 주 목적이지만, 사회운동이 개별적인 각각의 정체성 내부의 동질적인 요소를 통해 공유시키는 과정이라 이해해본다면 어느 정도 합당한 의견이 나온다. 바로 사회운동이 가지는 야누스적 얼굴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운동의 당위성 획득과 사회운동 참여자의 열린 의식은 앞으로 한국사회가 나아가야할 사회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68운동의 키워드는 바로 저항, 이 저항의 출발점은 모순에 가득 찬 현실이었다. 1968년에 일어난 격정적 분출은 그동안 축적된 다방면에 걸친 갈등이 마치 활화산이 터지듯 쉼없이 터져 나왔다. 다양한 수준에 입각한 현실의 갈등 잠재력의 분출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저항과 시위로 표현되는 각종 사회적 모순의 반기가 아닌, 68운동의 또다른 얼굴인 새로운 삶과 사회의 모습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험하는 다양한 문화적인 기획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더 커보인다. 이미 세계는 더 이상 광대함으로 비유되지 않고 ‘지구촌’ 이라는 마을을 뜻하는 어휘로 표현된지 오래이다. 전세계의 광역화는 오히려 세계를 더 좁게 만들었고 이것은 바로 그리스시대의 폴리스 국가를 연상시키게 한다.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시민광장은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비판, 비평하는 21세기 아고라 광장이 되었다. 물론 거기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익명성에 숨어서 감정의 배출구로 활용하거나, 증명되지도 않은 소문을 사실처럼 퍼트려 여론을 조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럼에도 인터넷은 국가를 초월한 네트워크로써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시위와 저항이 아닌, 패러디와 해학이 익살의 탈을 쓰고 세상의 부조리한 것들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현대판 문화혁명의 장이 마련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미국과 서유럽이 한 세기를 지나 구축한 정치경제 문화시스템을 반세기도 안돼서 근접하게 따라잡은 기억을 선명하게 가지고 있는 경험적 인식과,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길러진 선험적 인식이 공존하는 한국사회가 존재한다. 국수주의나 민족주의, 문화 사대주의에 입각하는 비약적 논리가 결코 아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자주권을 획득하기위해 행했던 수많은 시행착오가 가져온 뜻하지 않은 선물인 것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이유는 대면적으로 의사소통을 원활이 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 부재와 정치적 사회적 견제와 압박에서 비롯되었고, 정보통신의 활성화를 급속히 이뤘던 전래가 있던 만큼 습득과 활용의 속도가 그만큼 빨랐던 것이다. 대립과 대립의 만남은 큰 대립의 서막을 알리는 경우가 많았다. 저항운동이 68운동의 본질이었다면,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펼쳐질 사회운동은 바로 대립을 이완시키고, 대립을 비켜서면서 대립항과 피대립항간의 유쾌한 미소를 던질 수 있는 화합의 운동이 될 것 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으로 평론가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근대화가 군대화의 형태로 진행된 나라에서 백성들이 ’전사 기질‘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게 ’21세기를 리드하는 한국의 경쟁력‘이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런 전사 기질로 충만한 ’불량 한국이 모범생 일본을 추월‘할 것 같지도 않다. 모범생의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는 데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불량한‘ 깡패의 길과 ’불온한‘ 예술가의 길. 그런데 내가 보기에 미래는 ’전사‘ 의 시대가 아니라 ’예술가‘ 의 시대가 될 것 같다.’ 진중권, 「전사냐 예술가냐」『호모 코레아니쿠스』 웅진, 2007, 92쪽.
예술가의 길. 바로 68운동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귀중한 키워드이자, 한국 사회에서 나아가야할 시위 문화, 해학이 묻어나오는 혁명으로 귀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소중한 가치를 위해서는 피로 점철된 희생도 필요하다고 항변하는 논리와 인간애가 흐르는 혁명은 유토피아적 발상이라는 논리에게, 그럼에도 68운동의 시위를 막으려고 투입된 군인의 총에 기꺼이 꽃을 꽂았으며 촛불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쏘아대는 물대포를 향해 ‘온수’를 뿌려달라고 하였으며, 광장의 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바리케이트 대용으로 설치해둔 컨테이너 박스에 ‘명박산성’ 이라는 위트있는 이름을 달아준 사실. 엄연히 존재하고 앞으로 실현가능한 명제임을 알리고 싶다. 시위와 혁명에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희생과 폭력의 미학은 웃음과 사랑으로 환원할 수 있는 역설적 화두를 던져본다.
참고문헌
잉그리트 길혀-홀타이. 『68운동』 들녘, 2003.
강미화, 「독일 68운동의 의미와 유산」『경제와 사회』 제37호, 1998.
진중권, 「전사냐 예술가냐」『호모 코레아니쿠스』 웅진, 2007.
유재건, 「서구의 68운동을 떠올리며 촛불을 본다」『촛불이 민주주의다』 해피 스토리, 2008.
오제명 외, 『68세계를 바꾼 문화혁명』 길, 2006.
이성재, 『68운동』 책세상, 2009.
  • 가격2,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10.01.06
  • 저작시기201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7170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