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정부가 꿈꾸었던 사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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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 서론 1∼2 page


° 본론 2∼5 page
-삼별초의 성립과 성격
-삼별초의 난
-삼별초의 의의


° 결론 6∼7 page
-맺음말(삼별초 정부가 꿈꾸었던 사회)

본문내용

미가 크다. 고려 사회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노예, 그리고 향·소·부곡의 주민처럼 수탈이 자행되었던 섬의 주민들이 삼별초에 가담하여 한 것은 삼별초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민중의 정부임을 표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비록 패배하여 고려 전체가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써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럴 개연성이 크다. 1253년(고종40)몽고의 5차 침입 때 충주성 방호별감 김윤후는 다음과 같이 민중을 고무시켜 무려 70여 일에 걸친 몽고군의 강력한 공격을 막아냈다.
몽고병이 충주성을 포위하기를 무릇 70여 일에 성 안의 식량이 거의 다하게 되었다. 김윤후는 사졸들을 독려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힘을 다 바쳐 싸우는 사람이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관작을 내리겠으니 그대들은 내 말을 의심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관노를 등록한 장부를 가져다가 불태워버리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니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대적했다. 유현종, 『무인시대와 삼별초』, 대산, 2003 p. 154
몽고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김윤후가 전쟁에 공이 있는 자는 귀천을 불문하고 관작을 내리겠다고 하여 피지배 민중들의 항전을 불러일으켜 승리를 거두고 있는데, 이는 삼별초 정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삼별초가 꿈꾸었던 사회는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회적, 신분적인 차별이 없는 사회였다. 이로서 부의 균등한 분배, 토지 소유 관계의 모순도 극복될 수 있었을 것이나 당시 전쟁 상황에서 미래의 국가상에 대한 구상과 실천이 제대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중의 정부, 자주적인 독자 노선을 표방한 것은 농민들이 이중고 속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한줄기 빛이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중들이 봉기하고, 그들의 정부를 세운 예는 삼별초 이전에도 이후에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비록 외세의 무자비한 탄압에 무너지고 말았지만, 삼별초 정부가 피지배층이 기대하고 희망을 건 정부였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다. 삼별초 정부를 세우고 지켜간 인물들의 면면을 규명하여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서 과연 어떤 성격의 국가를 만들려고 했는지를 밝히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외세를 배격한 민중 항쟁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을 거쳐 1894년 갑오 농민 전쟁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으며 해방 이후에는 제주 4·3항쟁에서 그 모습이 드러난다. 아직도 남북한이 분단되어 있는 지금 우리는 외세에서 그리 자유로운 입장이 아니다. 오늘날 남북한이 풀어나가야 할 통일의 방향을 생각할 때 삼별초의 항전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되돌아보는 일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 참 고 문 헌
윤용혁,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일지사 2000
김 종, 『삼별초 그 황홀한 왕국을 찾아서 상, 하』, 바들산 1994
유현종, 『무인시대와 삼별초』, 대산 2003
이종서, 『모반의 역사』, 한국역사연구회, 세종서적 2001
이승한, 『고려 무인 이야기』, 푸른역사 200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18』, 국사편찬위원회 1977
김정한, 『삼별초』, 시와사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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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2.25
  • 저작시기20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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