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무신정권하의 권력구조변천에 대한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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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논


Ⅱ. 무인정권의 성립

1. 무신의 난
2. 무인간의 상쟁
3. 최씨정권의 성립


Ⅲ. 무인정권하의 권력기구의 변천

1. 중방의 변질
2. 교정도감
3. 도 방
4. 정 방
5. 서 방
6. 별초군


Ⅳ. 결 논


<참고문헌>

본문내용

金俊, 林衍 부자가 모두 삼별초의 무력을 장악하고 이를 手足같이 이용하여 그 권력을 유지하였으나 강화도 천도 이후에는 삼별초가 가장 중요한 무력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增補文獻備考 兵考에 「毅宗·明宗 이후 權臣이 집정하면서 날쌔고 굳센 군졸은 모두 삼별초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한 것만 보아도 삼별초가 날쌔고 용감한 자를 구성요건으로 하고 있으며, 삼별초 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용감무쌍한 삼별초가 군사, 경찰 및 刑獄 등에 있어서 그 기능을 발휘하였으니 먼저 경찰의 임무를 살펴보면 夜別抄의 생긴 동기가 도둑이 많아 이를 잡기 위한 것으로 이는 경찰 임무의 사명임에 틀림없다. 그 활동 범위는 수도를 비롯하여 지방까지 전국적이었다.
또 야별초는 刑獄과 罪人의 심문도 맡았으니 元宗 원년 也束達에게로 달아나 반역한 김수제의 父인 西京留守 金軾을 야별초에 잡아다 가두었던 예는 刑獄도 맡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親衛隊로서의 구실과 都城 수비의 예로서 고종 40년 몽고 사신 몽고대 등이 오자 왕이 강을 건너 昇天府의 신궐에서 이를 맞이하였는데 이때에 야별초 80명이 평복 속에 갑옷을 입고 왕을 쫓은 것과 고종 41년에 慶尙, 全羅 두 도에서 야별초가 각각 80명씩을 올리어 도성을 수비한 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야별초 내지는 삼별초는 權臣들이 이를 마음대로 이용하였고 그들은 다각적으로 이용되어 고종 40년 경부터는 정부군의 활동이 거의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야별초 내지는 삼별초의 활동이 활발하여 刑政 및 軍事활동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던 것이다. 별초군의 임무 중 가장 빛나는 것은 몽고에 대한 항전이었다. 사실상 최씨정권에 의하여 설치된 야별초 내지 삼별초는 그의 지도하에 警察·戰鬪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였으며 이것은 단순한 호위기관에 머무른 도방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 삼별초는 도방 및 마별초에 비교하여 보면 公兵的인 성격이 농후하다. 그들의 俸祿이 국가에서 지급되었으며 都領, 指論, 校尉 등 國家官制에 의한 指揮者가 배치되어 공적인 성격이 나타나는 데 대하여 도방, 마별초에서는 그러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삼별초는 公兵的인 성격이 농후한 私兵이라고 할 수 있으며, 후로 내려오면서 공병적인 성격이 더욱 농후해져 공적 기록인 高麗史 兵志에까지 그 연혁을 밝히게 된 것 같다.
Ⅳ. 結 論
高麗 武人政權 아래의 權力機構의 變遷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나 대체로 기존 학자들의 연구업적을 정리하는 데에 치중한 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에 지금까지 살펴본 무인정권하에서의 권력기구 변천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간단하게 다루어 본다면, 초기의 무인정권은 어떤 특정한 중심 인물이 없고, 쿠테타를 일으킨 무신들에 의한 集團執權體制를 이루었기 때문에 기존의 회의 기관이며 통수부격인 重房을 그대로 그들의 권부로 삼았다. 그러나 崔忠獻의 獨裁政權이 성립되고 나서는 중방 정치 대신 一人 獨裁의 통치질서가 새로 마련되어 武人政治는 한층 더 발달을 보게 되었다. 먼저 都房을 들 수 있으나, 이는 集團執權體制에서 獨裁體制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나타났다. 즉 최충헌 이전인 慶大昇이 처음으로 都房을 설치하여 자신의 신변을 보호케 하였던 것이다. 도방은 이후 강화되어 최씨정권의 私的 武力의 支柱가 되었다. 崔忠獻은 敎定都監을 설치하고 인사행정·비위의 규찰·세정 기타 庶政을 처결하여 一國의 정치는 이 곳을 통하여 재량되었다.
崔瑀는 아버지의 都房과 敎定都監을 계승하는 한편, 文士의 宿衛機關으로 書房을 설치하여 私兵의 宿衛機關인 도방과 더불어 文武 雙璧을 이루게 함으로써 문무 兩官을 거느리는 국왕을 방불케 하였다. 또 기동력이 있는 신변 호위 기관의 필요를 느꼈다. 이에 馬別抄를 조직하여 儀仗隊를 겸하게 하였다. 다시 公的 활동을 통하는 지배 기구를 필요로 하여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 夜別抄로 최씨정권의 공병적인 사병이었으나, 후에 三別抄로 그 편제의 확대를 보게 되었다. 한편 최우는 자기 집에 政房을 설치하여 一國의 인사행정을 장악하여 국가의 대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상 고려 무인정권 하의 권력기구 변천을 간략하게 살펴봄으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인정권은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크고, 文人政權에 비하여 현저한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 역사적인 의의를 살펴본다면, 첫째 고려 시대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文臣門閥의 귀족정치를 결정적으로 붕괴시켰다는 점이다. 이미 말했듯이 鄭仲夫 등의 쿠테타는 150년 이상에 걸쳐 발달하여 온 귀족정치를 전복시키고, 武人政治라는 특수한 정치형태를 약 100년 간에 걸쳐 발달시켰다. 무신정권은 고려사회를 前期와 後期로 구분하여 이제 지배층의 體質을 更新하게 하는 큰 계기가 되어 주었다고 하겠다.
둘째, 무인정권은 대외적으로 主體性이 매우 강하였다. 문인 정치는 문화적인 욕구에서 慕華思想을 자아내어 주체성이 약하였다. 그러나 무인정권은 성격상 반드시 문화적인 욕구라든가 전통에 구애될 필요가 없었다. 이런데서 무인정권은 전통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고, 대외적으로 나타내는 주체성이 강하였다. 이는 몽고와 근 30년 동안 항쟁을 지속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의 발전 방향도 文人政權은 중국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반면, 武人政權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독자적인 발전을 지향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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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1.12.31
  • 저작시기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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