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경화사족(京華士族)의 대두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경화사족의 형성
1) 경화사족 (京華士族)
2) 한양의 지정학적 위치.

2. 학계의 경. 향(京鄕)분기
1)남인내의 분기 현상
2)소론 내의 분기현상
3)노론내의 분기현상

3. 경화사족의 대두
1) 경화사족의 교육방식
2) 경화사족의 학문, 학통 성향.
3) 경화학계 내의 노론, 소론, 남인의 성향
① 노론 계열의 성향
② 소론계열의 성향
③ 남인계열의 성향
④ 위항지사들의 대두

4. 경화사족에 대한 고찰.

본문내용

도 크게 쇠퇴하였다. 세도지임(世道之任)이 더 이상 산림의 차지가 아니었던 정치적 상황변화 속에 학문정치의 전통도 약화되어 갔으며 주자학과 그 명분론에 근거하였던 조선 사회체제도 민의 저항에 직면하여 전면적 붕괴로 접어들었으나 산림은 그를 수습할 위치에 있지 못했다. 연하산림 임헌회가 “지금 사림의 공의(公議) 조정(朝廷)을 두려워하고 사유(士類)가 척리(戚里)를 두려워하며 國法이 小民을 두려워한다”고 하여 세도정치 아래 주자학적 정치원리의 파탄과 민의 저항을 직시하면서도 시대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을 처세의 방도로 삼았던 것은 조선사회의 해체기 산림의 좌절과 무력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전 사회적 변동으로 명분론적 사회질서가 더 이상 유지 될 수 없었던 만큼 재야도 내몰렸던 산림유자의 정통 주자학과 주자학적 명분론은 향촌사회 민에 의해서도 쉽사리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반면 산림에서 파생되었으나 점차 산림의 학통에서 이탈해 갔던 경화학계 내의 경화사족들은 활발한 관료로의 진출로 중앙정계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섬으로써 조선학계는 전면적 재편과정을 맞기에 이르렀다. 경. 향 분기에 따른 학계 재편과정에서 산림을 연원에 두었던 경화학계의 경화사족들은 아직 전통적인 학풍계승의 모습도 남아 있었으나 이제 사상적, 학문적 공감대를 가지게 된 경화사족 학자들의 일각에서는 당색을 뛰어넘는 학문적, 사상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명분론 퇴조의 사회분위기 속에 경화학계에는 누대의 서울생활로 士를 자처하게 된 중서계층이나 위항인등이 경화사족의 일원으로서 등장하였다.
북학사상 등 이른바 실학이라 불리는 학문적 성과는 대체로 경화학계 내에서 교류하던 확대된 외연의 경화사족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었다. 그것은 변화된 성장배경과 사회적 현실 속에서 이들이 가지는 士로서의 자기반성과 현실 직시, 그리고 전통 주자학과 주자주의에 대한 반성과 외래문물, 학술에의 개방적 태도등과 관련되었다.
또한 사회의 변화에 부응하면서 나타났던 경화학계의 새로운 학풍은 산림의 주자학과 주자주의가 퇴조함으로써 생긴 사상적 공백을 메우면서 확산되었다. 이는 조선후기사회의 변화에 따른 주자주의적 의리지학과 그 명분론의 청산 과정이었으며 사회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지적 풍토와 이념의 모색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사상사의 중요한 진전양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화사족들은 그들의 성장환경에 국한된 생활경험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경, 향의 분기라는 전 사회적 변동 속에 서울로부터 유리되어 갔던 지방사회와 민의 현실로부터 격리되고 있었다. 세도가문에 속하는 이들은 정조대의 박학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으나 집권 후에는 고증학에 치우쳐 개혁의지를 상실하고 19세기 상업발달과 도시적 번영에만 안주하여 지방사회에서 성장하던 세력들을 포섭하지 못하고 사회통합에 실패하였다고 보았다.
이들로서는 경화거족 또는 위항인 등 그들의 사회적 위상에 따른 사상적 편차와 생활경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시대적 과제로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구성하였던 경화학계도 재야유림과 전통주자학풍에서 유리되었음은 물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던 민의 요구가 동학 등 혁명적 사상으로 표출되는 가운데 그로부터도 심각하게 괴리되는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19세기 후반 개항과 개화 등의 사안에 대한 대응에서도 그 지지기반은 극히 한정된 층으로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대내외적 위기가 가중되는 가운데 맞았던 19세기 후반의 숨가쁜 현실 앞에서 그 대응방법을 놓고 경, 향의 다기한 입장이 충돌하였던 것도 실상은 18세기 이래 조선학계의 재편과정과 각 계열 학풍 및 사상적 지향의 전개와 관련되었던 것이다.
세계화와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지금 21세기에도 대한민국에서는 상경의 꿈을 가진 지방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서울과 지방의 엄청난 집값차이와 밀려드는 차량물결, 고층빌딩의 모습 등은 마치 다른 세계로 온듯 한 착각을 줄 정도이다. 이런 눈에 보이는 것 뿐 아니라 경제, 문화, 사상적 차이는 그 비교지역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를 보일 것이다. 서울과 지방이라는 두 단어로 대한민국을 서울과 그 나머지로 구분하는 우리의 모습과 조선시대 경화사족이 겹쳐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히려 조선후기 서울에서 유리되어간 지방의 재야 유림은 향유로 전락하였지만 시대상의 변화에 대응하여 한쪽에서 그들 간의 결속을 도모하면서 경화학계와 대립하거나 개성지식인의 경우 중앙으로의 적극적 진출을 모색하는 등 다양한 양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지금 서울의 존재와는 달리 조선에서의 서울은 왕과 행정기구가 존재하는 관료를 위한 도시였기에 관료의 임기가 끝나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누정을 짓고 서원을 세우기도 했다. 1학기 답사를 갔던 영산강 문화권의 담양 소쇄원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아름다운 누정과 안동의 도산서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지방의 문화는 결코 서울의 문화에 비해 열등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후기 경화사족이 대두하면서 서울의 권력독점은 곧 서울과 지방의 모든 분야의 편차로 나타났다.
지구반대편에 있는 친구와 전화통화를 할 수 있고 다른 나라의 소식도 검색 하나로 알아볼 수 있으며 우리의 첨단기술이 세계 1, 2위를 다투는 21세기지만 여전히 서울 = ‘한국’이다.
조선시대 경화사족의 경제적, 사회, 문화적, 사상적 발전은 오늘날 서울이 한류열풍을 세계로 확장시킬 수 있었던 근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지지기반이 얕은 경화사족은 대내외적 위기와 모순 앞에서 방황하는 한계에 부딪힌 과거를 거울삼아 점점 더 유리되어가는 서울과 지방사이의 골을 조금씩 좁혀나가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 참 고 문 헌 ≫
『조선후기 학계와 지식인』 유봉학.
『18세기 초 경화사족 시조의 작품세계와 시조사적 한 국면』 남정희.
『조선시대 당쟁사』 이성무.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이태진.
『다시 찾는 우리 역사 제 2권 -조선시대편-』 한영우
『19세기 경화사족 홍경모의 생애와 사상』 강석화
  • 가격2,3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10.03.16
  • 저작시기2006.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9114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