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말살과 일본쇼와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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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말살과 일본쇼와시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쇼와시대(昭和時代)
1. 쇼와시대란?
2. 쇼와천황
Ⅱ. 만주사변(滿洲事變)
1. 배경
2. 만주사변 전개과정
3. 만주사변에 대한 대응양상
4. 만주사변의 결과
Ⅲ. 한국문화(韓國文化) 말살(抹殺) 및 동화정책(同化政策)
1. 일제의 한국문화의 말살 및 동화정책 세 시기 구분
2.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 및 동화정책의 배경
3.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 및 동화정책의 내용

본문내용

위안부, 즉 노리개로 희생되기도 했다.
3.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 및 동화정책의 내용
(1) 내선일체(內鮮一體)
'내(內)'라 함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전, 그들의 해외식민지를 '외지(外地)'라 부른 데 대한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내지(內地)'의 첫 자이며, '선(鮮)'이란 조선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과 조선이 일체라는 뜻이다. 그들은 이미 1931년 만주사변 때 일만일체(日滿一體)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1937년 일본이 중국 침공을 개시하자, 당시의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 일본의 군인, 제7대 조선총독(재임 1936~1941). 조선총독으로 재임한 6년 동안, ‘내선일체’를 표방하여 일본어 상용·창씨개명·지원병제도 실시 등으로 한민족문화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는 이 대륙 침공에 조선을 전적으로 동원·이용하기 위한 강압정책으로 '내선일체'라는 기치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내세우는 태도나 주장
를 들고 나섰다. 한민족의 저항을 초기부터 말살·차단하려는 철저한 민족말살정책이었다.
(2)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
일본은 학교에서 조선인은 일본 천황의 신하라는 교육, 황국신민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인들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하게 하여 민족의 정신을 빼앗아 천황의 충성스런 신민을 만들어가려고 했다. 그 내용은
1.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우리들은 마음을 합쳐서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3.우리들은 인고단련해서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황민화 교육의 기본 방침은 유용한 지식과 온건한 덕성을 양성하고 제국 신민의 자질과 품성을 갖추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인 교사의 경우 일본어 통달의 시험에 자든가 총독부가 지정한 학교를 졸업한 자에 한정했다. 그러므로 교육의 내용은 왜곡되었으며 각 교과서의 권두에는 모두 일본천황의 칙어가 올려져 있었다.
또한 조선의 민족교육에 관해서는 사실을 왜곡하여 교육시켰고, 우리민족의 시조는 일본시조의 동생이라고 한다든가 아마테라스 오오카미는 조선인의 시조라고 했다. 일본은 황민화 교육의 일환으로 조선어도 말살했다. 황민화교육의 기본이 바로 민족정신과 민족어 말살에 그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인의 저항을 고려하여 국어인 일본어와 함께 조선어 및 한문이라는 과목을 두었다. 그러나 점차로 일본어와 함께 조선어 및 한문이라는 과목을 두었다. 수업 중 한문시간 이외에는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고, 이를 어길시 벌금 ,체벌을 가했고 때로는 정학처분 까지 불사했다.
3) 창씨개명(創氏改名)
동화정책의 마무리 단계를 나타내는 ‘창씨개명’의 시행에는 일본의 동화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내포되어 있다. 이 제도의 창설에 관해서 그 기본적인 논리를 살펴보면 첫째, 씨(氏)는 천황이 하사하시는 것이다. 둘째, 이것은 황국신민적 가정의 확립이다. 셋째, 조선문화 상의 중국모방 정신으로부터 탈각하는 일이다. 넷째, 내선일체의 완성이다. 이렇듯 창씨개명의 목적은 단순히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인 식으로 바꾸는 것뿐만이 아니고, 조선인의 가족제도를 일본의 집제도 아래 개 편입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인을 외형상으로까지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호적에 조선인의 신분사항인 성과 본관을 그대로 기록하여 남김으로서, 조선이 내지에 편입된 후에도 차별적 대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도록 했다. 이런 식으로 일본이 외지인을 내지에 편입시키려고 했던 것은, 외지인을 내지인으로 신분변경을 시킴으로서 내지인으로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외지인은 외국인도 아니고 완전한 일본인도 아닌 신분으로 남겨놓음으로서, 그 후에 발생하는 인권문제 등 복잡한 과제를 일괄 처리하기 위한 계획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일본은 창씨개명뿐만 아니라 내선결혼을 장려했다. 일본은, 피를 통한 내선융화, 내선일체는 역사상 되풀이된 내선융합의 복고로서 민족동화정책을 완수하기 위한 지름길로 간주했던 것이다.
(4) 신사참배
일본은 조선신궁으로 대표되는 신사를 통해 일본화 된 조선인을 형성하려했다. 일본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졌던 국가신도라는 신앙도 조선인들이 동일하게 수용하여야만 그러한 조선인을 양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완벽한 내선일체의 형성’이었다.
조선신궁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해보면 첫째, 이른바 천황제를 확립하기 위해 일본에서 실시했던 국가신도는 조선인 동화정책의 유용한 도구였다. 국가신도가 일왕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조선인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일본인들에게 있었기에, 조선신궁을 건립하였으며, 그들이 경건하게 낭송하게 하였던 교육칙어가 바로 그러한 사상의 발로였다. 조선신궁은 이러한 사상을 지지하는 조선내의 최상위 신사였고, 일왕이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일제가 1910년 이후에 신사를 적극적으로 건설하고, 1면에 적어도 하나씩의 신사를 건립하려고 한 것은 이러한 국가신도 힘을 조선전역으로 펼치고자 한 것이다.
둘째, 조선신궁은 참배라는 형식의 반복을 통해 조선인을 일본인화 하려 했다. 조선인들은 ‘조선신궁’에 찾아가, 신궁에서 정해준 규칙대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배전에서 경배를 드렸다. 이러한 과정은 단지 일회성이 아니었고, 조선인들은 절기마다 심지어는 매일 그 절차를 반복했다. 이는 조선신궁을 위시로 한 조선 내의 신궁이 조선인을 일본화 시키는 정신적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전역이 전시체제로 접어들면서, 조선신궁은 싸움터로 향하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위한 기도의 장소로 이용되면서, 싸움터로 자식을 보낸 사람들은 자식의 안녕을 위해서는 조선신궁에서 기도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까지도 갖게 하려 했다.
셋째, 일제는 이러한 신사참배의 핵심적인 매개체로 ‘학교’를 이용하였다. 아침마다 교육칙어를 암송하고, 그 교육칙어를 준 일왕이 있는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살아있는 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요배하였다. 이는 ‘황민화 작업’이 학교를 통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며, 적어도 이 황민화 작업에 표면적으로라도 참여하지 않고서는 학교를 다닐 수 없음을,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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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3.19
  • 저작시기2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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