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과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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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국내상업
(1) 도시상업
(2) 지방상업
(3) 고려 후기 상업의 발달과 신분제의 변동

2) 대외무역
(1) 원과의 무역
(2) 다른지역과의 교역

3) 화폐의 유통
(1) 포화
(2) 은병과 소은병
(3) 쇄은과 은전
(4) 원의 보초
(5) 저화

본문내용

을 하다가 점차 일반적인 칭량화폐로 통용되었다. 충렬왕 13년(1287) 쇄은에 구리를 합주하는 것을 금한 사실로 보아 이미 충렬왕 무렵에는 쇄은이 널리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5년(1356)에는 쇄은을 정식화폐로 채용하자는 논의가 대두된 것으로 보아 쇄은이 은병을 대신하여 널리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은전은 은병이나 포가 조악하여 거래에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안정된 가치를 가진 매개물의 필요에 따라 발행되었다. 이는 중국화폐를 모사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널리 유통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소은병 절반 가치의 은전을 주조한 것은 은화 유통이 점차 일반민의 수요에 따라가게 된 것을 반영하고 있다.
(4) 원의 보초
원 간섭기에 들어와 화폐사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원의 지폐가 유입되어 사용된 점이다. 전함 건조비 등의 명목으로 유입된 보초는 처음에는 단순한 군요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여원연합군의 일본침략 준비를 계기로 점점 원 경제권에 통용되는 공통 화폐적 성격이 농후하게 되었다. 은 부족 현상 또한 보초 유입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 유통된 보초에는 지원보초, 중통보초, 지대은초 등이 있었다.
보초는 왕이나 승려 등의 원 왕래 비용, 군사비 조달, 연회 비용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려는 정치적 간섭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원 보초 통용권 속에 편입되게 되었다. 하지만 원의 몰락이후 보초는 휴지나 다름없이 되버려, 보초 소지자들은 큰 경제적 타격을 받았으며, 나아가 이러한 타격은 권문세족의 정치적 몰락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5) 저화
원 간섭기에서 벗어난 후 새로운 화폐의 유통질서를 마련하기 위한 논의가 시도되었다. 간관이 은전과 5승포의 병용을 주장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은화를 본위화폐로 하기에는 은 보유량이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화폐제 논의는 공민왕 3년 저화발행론으로 이어졌다. 이는 은이 부족한 상태에서 채택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었다.
공민왕 때부터 시작된 화폐제 개혁론은 쇄은포화 등 국가의 품위 보장을 거치지 않고 유통되던 화폐에 대하여 국가가 발행권을 재장악함으로써 품위를 안정시키려는 의도의 일환이었다. 저화 발행이 구세력의 경제적 부활에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상, 저화 발행은 중지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로서 조선 태종 원년 사섬서가 설치되고, 이듬해 저화 2000장이 처음으로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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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0.03.24
  • 저작시기2006.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93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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