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사회와생활문화 -<양동마을을 다녀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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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통사회와생활문화 -<양동마을을 다녀와서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양동의 역사
1) 마을내력과 전설
2) 양동마을 고분군
3) 양동마을 지명

2. 양동의 문화
1)양동의 뿌리
2)민속놀이와 전래민요

3. 양동의 경제
1) 양동마을의 주업
2)양동마을 부업
3) 그 밖의 경제요소들

본문내용

정부의 지원으로 건설하였으며, 못 들의 몽리자(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큰못을 관리하면서 장뻐든과 문고개 골짝에서 흘러오는 물을 저장하여 농사를 경작하고 있으나 들판의 크기에 비하면 농업용수가 부족하다.
작은 못은 아랫마을(새터)의 철도변에 있는 못으로 새터 주변의 논으로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양동 정미소에서는 못들의 부족한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정미소에 회야강의 강물을 들판으로 양수하는 시설을 설치하였다. 모내기를 하거나 가뭄이 계속되는 시기에는 하루 종일 양수를 하였다.
또한 회야댐의 건설됨에 따라 기존의 보가 사라짐에 따라 농업용수의 공급이 어려워져서 울산시와 협의하여 회야 댐에서 방류하는 용수를 매설관로를 별도로 설치하여 보들과 못들로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못들과 보들에는 구역별로 들판에 급수밸브가 설치되어 있어서 밸브만 열면 필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할 수 있어서 아주 편리하게 농사를 경작하고 있다.
*전기 및 전화
우리 마을의 전기는 1970년 덕하에서 남창으로 이어지는 남창선의 전기 공사의 추진으로 양동에도 전기가 공급되었다. 1970년에는 새터 마을의 주변인 1, 2반에 먼저 전기가 공급되었으며, 1973년 굽마을에도 전기가 공급되었다. 전기가 공급됨에 따라 마을에도 많은 변화가 되었다.
먼저 호롱불로 밤을 밝히던 방법에서 백열전구를 사용하게 되었고, 텔레비젼의 보급으로 도시(서울)의 문화가 직접 시골의 안방에서 시청할 수 있어서 문화적 혜택은 물론 시골 어른들의 의식이 개화되는 계기가 마련하였다. 이때부터 초등학교만 보내고 마는 가정에서도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중등학교까지 공부를 시키게 되었다.
또한 우리 마을에서는 겨울 부업으로 많은 가정에서 실 새끼를 짜는 새끼기계의 동력을 사람의 힘으로 이용하였으나 전기의 공급으로 모터를 구입하여 전동장치를 이용하여 편리함을 물론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왔으며, 농한기인 겨울철 부업으로 농가의 가정경제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통신수단인 전화는 정부의 지원으로 1979년 행정 연락용으로 당시 이장 이길우씨 댁에 전화가 설치된 것이 처음이며, 마을 전체의 전화는 80년대에 들어와서 가정마다 전화가 설치되었다.
현재에는 한 가정 2대 이상의 전화기를 연결하여 편리하게 통신을 이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젊은 사람이 있는 많은 가정에서는 PC통신과 인터넷을 이용하여 대도시의 농산물거래 가격을 검색하여 농산물의 판매에 이용하고 있으며, 휴대폰의 보편화로 개인 통신 수단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통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통신수단은 크게 발달하였다.
*점토생산
양동 마을은 옛날부터 점토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으며, 생산되는 점토의 종류는 옹기와 기와를 만드는 흑점토와 도자기를 만드는 백점토로 구분된다.
흑점토의 출토지는 새터(아랫마을) 부근으로 약 2000여평에서 출토되어 양동에 있는 기와공장과 온양면 원동, 외고산의 옹기 공장에서 사용되었다. 백점토는 양동마을 북쪽인 허근집골 산 45번지 일대의 박종문씨의 과수원과 이상인씨의 과수원에서 출토되어 부산 영동의 도자기 공장에서 사용되었다.
*옹기와 기와의 생산
양동의 옹기 가마는 1955년 동천리 山 31번지에 김귀방씨가 설치하여 문어 단지를 생산하여 어촌에 판매하였으며, 그 이후 생활용 옹기인 질그릇과 유약그릇을 1964년 2월까지 생산하였다.
기와 생산은 1962년 새터 마을 뒷편(지금의 마을 입구 장승 주변)에 이상 원(덕하 거주)씨가 처음 기와를 생산하였다.
그 후 김기찬(양동)씨가 인수하여 운영하다가 기와 공장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로 인한 피해가 심하여 서당 산 뒷편 골짝(현 KIC 공장 부지)으로 이전하여 기와를 생산하였다.
기와공장은 다시 이상태씨가 인수하여 1980년까지 기와를 생산하였다. 생산되는 기와는 흑점토를 이용한 토기와, 시멘트를 이용한 시멘트기와를 생산하여 청량면, 온양면 인근에서 사용되었다.
*도로 부역
교통이 불편하던 시기인 해방이후에 울산 인근의 도로를 건설 및 보수하는 작업에 양동 동민들이 부역으로 참여했다.
양동 동민들이 참여한 곳은 국도 14호선 양동 구간, 국도 7호선 율리구간, 덕하에서 율리로 통하는 율리선, 중리선 등이 있으며, 도로의 보수작업은 각 개인에게 10∼20m씩 할당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보수작업을 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인건비를 지불하여 자신에게 할당된 책임량을 완수하였기 때문에 몸이 허약한 사람은 자신의 토지를 팔아서까지 도로 부역을 담당하였다.
또한 산중의 도로에는 도로 보수를 위한 자갈이 없었기 때문에 마을 별로 차량을 임대하여 강가의 자갈을 운반하여 보수를 하였기 때문에 양동 동민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현재의 편리한 교통여건에는 자신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보람을 가지고 있다.
*골재 채취
양동 마을은 회야강과 국도 14호선이 지나가므로 교통이 편리하고, 회야강에는 양질의 골재(자갈과 모래)가 많이 있었다.
국가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울산을 국가공단으로 지정하여 울산에 많은 공장을 건설하면서 여기에 소요되는 수많은 골재를 울산 인근에서 충당하였다. 그 중에서도 양동 마을의 자갈과 모래는 골재로써 우수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골재 채취 기계를 동원하여 막대한 양의 골재를 채취하여 울산의 공업단지 건설에 사용되었다.
골재를 채취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방법은 페이로더를 이용하여 골재를 크기별로 선별하는 회전기계 에 넣어 채취하는 방법이고, 두 번째의 방법은 자동차 모양의 채취기계에 연결된 두레박을 이용하여 골재를 채취하는 방법이며, 세 번째의 방법은 선박용 채취기계에 두레박을 이용하여 골재를 채취하는 방법이 있었다.
골재를 채취하는 방법에 따라 골재를 채취한 강물의 깊이가 차이가 있으며, 그 중에서 선박용 채취기계는 약 5m 이상의 깊이로 채취를 하였다. 양동 마을의 골재채취는 골재 채취 업체에서 농업용 보를 시멘트로 건설해주어 농사와 경제 발전에는 크게 기여를 하였으나 서들 거랑의 금빛 모래와 아름다운 자갈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며, 골재 채취로 인한 깊은 물구덩이는 여름철 목욕을 하면서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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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4.15
  • 저작시기2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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