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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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비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삼국사기
1) 당대의 역사인식
2) 편찬목적
3) 김부식의 생애와 역사의식
4) 사학사적 위치

2. 삼국유사
1) 당대의 역사인식
2) 편찬목적
3) 일연의 생애와 역사의식
4) 사학사적 위치

3.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비교
1) 체제의 성격
2) 서술방법의 차이
3) 사학사적 의의

4.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겠으며, 당시의 민속·고어휘·성씨록·지명 기원·사상·신앙 및 일화 등을 대부분 금석 및 고적으로부터의 인용과 견문에 의하여 집대성해 놓은 우리나라 고대 정치·사회·문화 생활의 유영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일대 서사시라 할 수 있겠다.
「삼국유사」가 지니는 사학사적 위치는 대세에 역행하는 복고적인 것으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의 현대사학에서 지니는 의의까지가 덜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마도 「삼국유사」가 현대에서 지니는 의의는 다음의 두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특히 전거를 밝혀 주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전거를 제시한 인용문은 일연이 이를 자의로 변경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와는 달리 소박한 표현들이 그대로 남아서 전존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오늘날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거의 무한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더구나 인용된 많은 원전들이 남아 있지 않는 오늘에 있어서 특히 그러하다.
둘째로는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이다. 이것은 근대사학도 마찬가지로 짊어지고 있는 과제였기 때문에 자연히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배외적인 경향을 띤 중국중심의 사관에 대한 비판은 근대에 민족사적인 자각이 커가면서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이점 또한 「삼국유사」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삼국유사」에는 풍부한 신화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대한 이와 같이 근대사학의 평가에도 제약이 있다. 우선 사료적 가친 그것이 사료집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연이 전혀 예기하지 못한 일이었다. 만일 원사료들이 망실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면 사료적 가치에 대한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을 성질의 것이다.
가령 감산사의 조상명은 실명이 남아있어서 훨씬 자세하고 정확한 원문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약기되고 잘못된 판독이 섞여있는 「삼국유사」의 인용문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또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 「삼국유사」와 근대사학이 축을 같이하지만, 그렇다고 「삼국유사」에서 제시된 고대사관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다.
3.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상호비교
(1) 체재의 성격
삼국사기가 왕명을 받들고 김부식이하 10여명의 편찬위원들이 편찬한 정사였던데 대해서,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사찬서였다. 이 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체재를 성격이 매우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즉 「삼국사기」는 중국에 있어서 정사를 편찬하는 표준적 체재인 기전체를 취하게 하였으나, 「삼국유사」는 저자의 관심의 각도에 따라서 자유로이 주제를 선택할 여지가 더 많이 허락되는 체재를 갖추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체재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저자 개인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자유로운 형식의 사서류인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삼국사기」도 일정한 목적 밑에 기사를 선택하고 이에 대한 편찬자들의 해석을 가미시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사로서의 성격상 왕실 중심, 통치자 중심의 사료가 주된 편집 대상이 되었다. 「삼국사기」에서 민중 관계 사료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은 그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그러한 제약을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귀족이나 민중이나 간에 일연은 아무런 제약 없이 관심의 대상이 된 사료들을 수집하여 수록하였다.
이 점에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하여 주제나 사료의 선정이 훨신 자유로왔다고 볼 수 있다.
(2) 서술방법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과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극히 적은 분량인 사론을 뺀다면 어디까지가 사료이고 어디부터가 편찬자의 의견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운 서술방법을 취하였다. 원칙적으로 「삼국사기」가 기존사료의 편찬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때로 필요에 따라서 본문의 서술 자체를 편찬자의 목적에 맞추어 수정가필하고 있다. 이것은 「해동고승전」이나 「역옹패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그와는 다른 독특한 서술방법을 취하였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에 그는 <상지론지><의왈> 등으로 분명히 자신의 의견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편찬은 전거를 밝혀서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방식을 취한 결과 일연은 자연히 많은 사료를 수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신의 논거를 굳게 뒷받침해 주려고 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3) 사학사적 의의
「삼국사기」는 인종 23연(1145)에 고려 귀족문화를 정리하고 강렬한 국가의식을 표출하는 가운데 중국의 역사관을 수용하면서도 독자성과 융통성을 강조하여 현실긍정과 합리성이 두드러진 사서이다.
그런데 일연이 「삼국유사」전편을 통해 강조하는 신이는 민족 자주성과 문화의 우위성을 내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외세의 압제에 대항하여 그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의 원천이 자기 전통이라는 강한 확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민족사를 파악하는 정신사관에 의해 대단히 폭넓은 역사와 불교를 정리하였다.
일연이 각고 끝에 수집한 사료의 전거를 소박한 표현으로 명시하고 자신이 직접 답사하는 등의 용의주도한 노력으로 고증한 수많은 서목이 실린 「삼국유사」는 다양함이나 치밀함에서 「삼국사기」보다 훨씬 뛰어나며 원사료의 본모습을 더 많이 전해주어 그만큼 사료적 가치도 높다. 객관적 서술태도를 가지고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찬술태도로 채록한 많은 민간전승 자료들이 고대문화의 원형에 더욱 가깝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일연이 차지하는 사학사적 의의는 대단히 크다.
4. 참고문헌
이우성, 『한국의 역사인식』, 창작과 비평사, 1974.
김태영, 「삼국유사에 보이는 일연의 역사인식에 대하여」,경희사학 5권6, 1974
이기백,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 창작과 비평사, 1976.
이재운,「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비교」, 충남대학원, 1983.
조동걸, 한영우, 박찬승 공저,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上, 창작과 비평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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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4.28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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