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부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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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 부장유물에 대하여

2.구석기 시대 및 신석기 시대의 부장유물

3.청동기 시대 및 초기 철기 시대의 부장유물
(1)민무늬 토기의 종류
(2)청동기 시대의 각종 석기 및 청동기
(3)말갖춤(馬具)

4.삼국시대 및 가야의 부장유물
(1)고구려 고분의 부장유물
(2)백제 고분의 부장유물
(3)신라 고분의 부장유물
(4)가야 고분의 부장유물

5.통일 신라시대의 부장유물

6.고려시대의 부장유물

7.조선시대의 부장유물

8.나오는 말

본문내용

로 불렸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철제띠는 무덤의 주인공이 2세기 전반 이 지역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며, 후대의 금동관과 연결된다.
3) 동래 복촌동 고분군
현재 부산의 가장 대표적인 고분군인 동래 복천동 고분군은 남부 지방 최대의 고분군 중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발굴조사결과 확인된 무덤수만해도 113기이며 10분에서 마주가, 주곽인 11호분에서는 금동관, 철제갑옷, 환두대도 등이 촐토되어있으며, 22호분에서는 금동관, 샤머니즘저인 주술의 의미가 있는 청동제 7두령(방울이 7개가 달린 유물 - 제사에 쓰였다고 추정) 등이 출토되었다. 북천동 고분군의 발굴에 있어서 최대의 성과중 하나가 당시의 군사조직 및 정치사회 구조들을 규명할 수 있는 철제갑옷의 다량 출토이다. 갑옷의 일정한 형식화는 4세기대 영남지방에서 이미 갑옷이 대량생산과 보급이 일반화되었으며 이미 완비된 군사체제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또한 이 4세기 때 갑옷은 보병용으로 당시 전술이 보병전임을 시사해준다. 고구려벽화에 묘사된 투구와 일치된 것으로 보아 영남지방의 4세기대 갑옷의 원류가 고구려의 갑옷문화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자이기는 형태에 따라 3개 지역군으로 나누어지는데 유자이기는 다분히 수장총 또는 지배층을 상징하므로 각 지방에 있어서 독립적인 수장권력을 의미하며, 특히 철정(덩이쇠)은 고대에 있어서는 강력한 통치의 수단이 되는데 규격이 경주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철정(덩이쇠)의 제작은 금관가야에서 강력한 수장의 통치하에서 획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보아 제작뿐만 아니라 철 생산과 철기의 제작까지도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4) 김해 대동면 덕산리 고분군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기마인물상토기
)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제275호. 높이 23.2 cm, 너비 14.7 cm. 김해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나팔모양으로 된 굽다리접시[高杯]의 대각(臺脚) 위에 직사각형의 판을 설치하고 그 위에 기마인물형상을 올려놓았으며, 말의 둔부에 2개의 뿔잔[雙角杯]을 부착시켰다. 말은 말머리꾸미개[馬面]를 하고 갑옷[馬甲]을 입고 있다. 무사는 양쪽 다리를 등자(윙子)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왼손에는 마름모무늬[菱形文]가 채워진 방패를 쥐고, 오른손에는 창과 같은 무기를 쥐고 있으며 몽골 바리모양[鉢形]의 투구와 경갑(頸甲)을 갖추고 있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마갑, 직선으로 다듬어진 말갈기, 약간 회화적인 바리모양 투구, 기마인물보다 훨씬 큰 두 뿔잔이 인상적이다. 특히 이 토기는 금령총(金鈴塚)에서 출토된 국보 제91호 도제기마인물상과 비교되는 우수한 유물로서, 출토지가 확실한데다 아직까지 실물이 전하지 않는 방패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가야시대의 토기뿐만 아니라 마구(馬具)와 무구(武具)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는 가야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가야시대 유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이 인물상은 토기에 붙은 장식용 흙인형으로 토기 생김새는 굽다리, 갑옷을 입힌 말,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인물을 차례로 포개어 놓았다. 인물상 뒤에는 짐승의 뿔 한쌍을 거꾸로 세운 듯 배치하였다.
5. 통일신라의 부장유물
신라의 전형적이고 독특한 적석목곽분은 삼국통일을 전후로 하여 간편하게 규모가 적은 석실분으로 바뀌게 되고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화장묘가 유행하게 된다. 그리고 당(唐)의제정 실시하던 박장령(薄葬令)의 영향으로 후장의 풍습이 쇠퇴하였다.왕릉이외에는 봉분도 없는 것이 많아지고, 산위에 작은 석실을 만들어 뼈를 담은 독을 그 속에 넣으두는 등 민간의 분묘는 보잘것없었다.
6. 고려시대의 부장유물
고려시대의 무덤은 크게 왕릉(王陵)과 민묘(民墓)로 나누어지며 수도인 개성 주변지역과 강화도 지역에 석실묘로서 왕릉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고려의 왕릉중에서는 도굴되어서 내부가 노출된 명종(明宗)의 지릉(智陵:1192)이 대표적이다. 이 지릉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개원통보(開元通寶)
) 당(唐)나라의 대표적인 청동화(靑銅貨).
, 황송통보(皇宋通寶) 등의 당시의 화폐와 청자등이 발견되었다. 고려시대 왕릉에는 부장품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고 때로는 석실에 다 들어가지 못한 물건들은 석실 입구에 작은 부곽을 남들어 그 속에다가 묻기도 하였다.
민묘는 조사된 것이 많지 않으나 대부분 목관으로 토장하고 봉분을 작게 만들었다. 부장품도 일상생활의 애완품으로 바뀌고 명기(明器)
) 명기(明器) :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묻는 식기(食器), 악기(樂器), 무기(武器)등의 무물(武物)을 말하는데 신명(神明)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풍으로 바뀌었다.
7. 조선시대의 부장유물
조선시대의 무덤은 왕릉과 민묘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고려시대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
왕릉은 관을 안치한 다음 관주변에다 명기와 옷감, 노리개등을 진열하였다. 그리고 민묘는 고려시대와 비슷하게 명기와 묘지석(墓誌石)
) 묘지석(墓誌石) : 죽은 사람의 성명, 신분, 행적 등의 기록을 돌이나 사기(沙器), 흙 등을 다져 새기거나 써서 무덤 앞이나 관위에 묻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광지(壙誌), 묘지(墓誌) 또는 지석(誌石)이라고 한다.
을 부장하였다.
8. 나오는 말
고분유물은 당시의 사람들의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부장한 것으로 종합적으로 그 변화를 살피면 당시 사람들의 의식변화를 알 수 있게 되고 피장자의 성격이라든가 장송 의례 등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요컨대 고분의 구조와 함께 고분유물을 종합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고분의 축조연대와 피장자의 성격, 장송의례의 변화 등을 해명할 수 있을 것 이다.
【 참 고 문 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사, 1991
이정수, 박원출, 조원영, <테마가 있는 한국 문화>, 선인 1999
한국 역사 연구회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199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17>, 1994
김기웅 <빛깔있는 책들 - 고분유물>, 대원사, 1992
이영진, 김약수 <문화재조사연구입문>, 학문사, 2000
정영호 감수, <그림과 명칭으로 보는 한국의 문화 유산>, 시공테크, 1999
【 미 주 】

키워드

부장유물,   고분,   유물,   부장
  • 가격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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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0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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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0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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