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투쟁(義兵鬪爭)을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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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머리말

2.전기의병투쟁

3.중기의병

4.후기의병

5.독립군으로의 발전

6.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해 건설된 의병기지는 훗날 독립군기지로 전환되었다.
남부지역의 의병들은 지리산과 해안 조서지역을 의병의 기지로 주목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1907년 후반을 전후하여 추진되었는데, 의병장 고광순과 김동신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른바축예지계(蓄銳之計)라하여 지리산을 근거지 삼아 의병을 정예의 군대로 훈련시켜 장기항전을 모색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의병들은 도서지역을 일시적 피난처나 근거지로 이용하였다. 일제가 근래의 의병들은 여러 섬에 집중하는 경향이라거나, 도서지역을 의병의 소혈(巢穴)로 인식한 점으로 보아 그러하다.
이상의 조건을 기반 삼아 후기의병은 일제의 정치경제군사적 침략에 맞서 투쟁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의 식민화 정책을 좌절시키려 하였으나 그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다. 일제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일제의 식민화정책을 지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5.독립군으로의 발전
일제의 통감부와 친일정권은 의병전쟁이 갈수록 격화되자 다양한 진압방법을 동원하였다. 먼저 선유사(宣諭使)와 선유의원을 파견하여 의병의 해산과 귀순을 종용하였다. 1907년 후반부터 1909년에 이르기까지 선유사와 선유위원이 지속적으로 파송된 것이다. 이들은 군청소재지의 객사나 시장터 등지에서 면이장과 주민들을 상대로 선유조칙을 읽고 의병의 해산과 귀순을 권유하였다.
다음으로 의병의 귀순을 적극 장려하였다. 1907년 12월에 귀순자조례를 발표하여 일제의 군경기관을 비롯한 행정기관과 선유사와 선유위원 등이 귀순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듬해의 의병활동을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전국의 군면 단위까지 자위단을 조직하여 의병활동을 방지하고 주민과의 연계를 차단하여 의병을 고립시키려 하였다.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은 군사력을 동원한 것이었다. 일제는 이를 위해 군대와 헌병 및 경찰력을 증강, 배치하였다. 예를 들면 군대의 경우 이미 조선에 배치된 조선주차군의 2개 사단 되에도 1908년 5월에 2개 연대 1,600명을 증파하였으며, 1909년 6월부터 여단규모의 임시 한국파견대가 증강 배치되었다. 또한 헌병대의 경우에도 1907년 10월에 200명의 규모였으나, 다음해 9월에는 6,500명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일제의 통감부와 군경기관에서는 밀정이나 정탐을 고용하거나, 정찰대를 조직하여 의병에 관한 제반 정보를 수집하였다. 1908년 7월 현재 일제에 고용되어 전국에 파견된 정탐원이 800명이나 되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의병진압과 적정정찰을 목적으로 한 특설순사대(特設巡査隊)를 편성하여 의병항쟁이 치열한 지역에 투입시켰다. 특별순사대는 3개 부대로 편성되었는데, 제1순사대는 강원경상도, 제2순사대는 전남, 제3순사대는 함경도지역의 의병을 진압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 의병들은 주로 황해경기강원한경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1909년 10월부터 1915년경 까지 의병활동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이름을 떨친 의병장으로는 채응언(蔡應彦), 강기동(姜基東), 한정만(韓貞萬), 유인석, 임병찬, 홍범도, 이진룡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도 일제의 진압을 견디지 못하여 국외로 망명하거나 잠적하여 비밀결사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연해주나 간도로 망명한 의병장으로는 이진룡과 홍범도 등인데, 이들은 그 곳에서 활동중인 이범윤안중근 등과 연합하였다. 1910년 6월에 유인석과 이범윤을 중심으로 의병연합체가 조직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이다. 13도의군은 연해주와 간도를 비롯한 전국 13도의 의병을 아우르는 통합단체를 표방하였다. 이로써 의병의 중심이 국내에서 국외로 이동되었다.
나아가 연해주와 간도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애국계몽운동가들과 힘을 합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민족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무장투쟁과 실력양성을 주장하던 양대 세력이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향해 통합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병전쟁은 독립운동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 국내외 전라충청도 지역에서는 임병찬의 주도로 비밀결사로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대한독립의군부는 1912년에 고종의 밀명을 받아 전국단위의 광범한 조직으로 추진되었으나 1914년에 발각되고 말았다. 경상도지역에서는 민단조합(民團組合)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등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의병장 강기동은 연해주로 이동하려다가 원산에서 체포되었으며, 채응언은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15년 7월에 체포되었다. 이로써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은 거의 종식되었고, 국외로 이동한 의병들은 독립운동으로 전환하였다.
6.맺음말
이상과 같이 의병전쟁은 1894년에 봉기하여 1915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약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의병들은 불굴의 의지와 투쟁역량을 강화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섰던 것이다. 따라서 의병전쟁은 반침략적 구국운동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의병전쟁은 평민의병장이 대거 등장한 후에 더욱 활성화됨으로써 반봉건적 성향은 띠기도 하였다. 의병들은 투쟁역량의 강화에 힘을 기울여 근대적인 부대편제와 연합전선의 형성, 장기항전의 기지를 구축하기위해 노력하였다. 다만 의병들은 일제의 군사력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열악한 상태에서 투쟁함으로써 국권회복이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열악한 상태에서 투쟁함으로써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의병전쟁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광범한 계층이 호응하고 참여한 민족운동이었다. 따라서 의병전쟁은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근현대사연구회 編,『한국근대강의』, 한울아카데미, 1997.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編,『의병전쟁연구』, 지식산업사, 1990.
신용하,『의병과 독립군의 무장독립운동』, 지식산업사, 2003.
김상기,『한말의병연구』, 일조각, 1997.
홍영기,『대한제국기의 호남의병연구』, 일조각, 2004.
목차
1. 머리말
2. 전기의병
(1)전기의병의 반개화반침략투쟁
(2)전기의병의 참여층과 성격
3. 중기의병
4. 후기의병
5. 독립군으로의 전환
6. 맺음말
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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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2
  • 저작시기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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