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 침략에 대한 신민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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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경제 침략에 대한 신민회의 대응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머리말

2.1900년대 서북지방의 사회경제적 상황

3.신민회의 경제사상
(1) 경제구국운동의 방향
(2) 자립경제사상
(3) 실업진흥론
(4) 민족자본형성론

4. 신민회의 경제활동

5. 맺음말

본문내용

조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자기 제조 훈련생제도가 있었는데 이 제도를 이용하여 유수한 젊은이들을 엄격하게 선발하여 일정한 훈련과정을 거쳐 신민회원으로 가입시킨 바
) 《百五人事件資料集》, 앞의 자료집, 140∼142쪽
있다.
요컨대 평양 마산동 자기회사는 표면적인 실업장려와 민족산업의 표본으로서의 경제적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으나 신민회원의 훈련과 조직면에서는 그 취지를 십분 발휘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 일제는 자기회사를 가리켜 음모의 소굴이라고 단정하였던 것이다.
이 회사 외에 신민회가 경제사업의 일환으로 설립한 태극서관이라는 신민회 조직산하의 기관으로서 각종 유인물과 서적 등을 출판 공급하기 위해서 설립된 서점이있다. 이러한 성격으로 태극서관은 신민회원들의 연락장소 및 집회장소로 자주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런 태극서관은 서울과 대구에 개설되었고 그 설립시기는 1908년 5월경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서북지방은 물론 각 지역에 설립할 학교에서 사용할 각종 교재를 공급 판매하는데 우선 목적이 있었고, 이 사업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서울에 지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 지점을 설치한 그해 10월 朝鮮光友會가 조직되었고, 여기서 三國史記, 東國通鑑, 擇里志, 海東小學 등의 서적이 발간되었으므로 이러한 서적이 태극서관을 통해서 유포되었을 것이다. 서적간행을 통한 유포, 특히 그 책들이 역사서 였다는 사실은 민족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태극서관의 설립취지는 당시 전국각지에 발흥하던 교육기관에 신지식과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각종 서적을 공급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된 것으로 상업적인 이윤추구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비상업적인 업종이라고 할 수 있다.
5.맺음말
이상으로 지금까지 신민회 상공업자의 경제활동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들 상공업자들이 활동하던 1900년대는 위에서 주지한 바와 같이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강고하게 획책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북지방 상공업자의 경제활동은 결코 일본의 외압 앞에 순응한 연약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그들이 종사하고 있던 업종, 곧 잡화업과 무역업 그리고 자기회사와 서적업 등의 설립 취지와 자본의 규모 그리고 이에 관여한 인적 구성원의 성격등에서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위의 업종들은 적어도 1903년 현재까지 서북지방에서는 일상들이 독점하고 있던 근대적 신규업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업종에 이들 상공업자들이 관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상무동사 총지점의 설립과정에서 볼 수 있듯 100여명의 출자자에 의한 9,000원의 자본금을 공동출자함으로서 일상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잡화업체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태리의 무역상사인 파마양행과 1만 5천원에 해당하는 대규모의 직수입무역 거래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 3국을 통한 상품의 수입시도는 곧 일본 수입상품 판매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의 일환이었음은 물론이었다.
1908년 6월 평양에 설립된 자기회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였다. 6만원의 설립 자본금모금을 1,200주의 주식을 공모하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거족적인 민족 산업체로 발족하였으며 설립 후 곧 회사 내에 청년들에게 기술연마와 조선혼을 불러 일으키는 민족교육의 장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승훈이 제창한 관서자문론은 서북지방의 상인과 자본가들의 열약한 자본을 집약하여 강고하게 침투해 오는 외국자본침투의 대응양태로서 추진되었던 일종의 민족 자본 형성론이었다. 앞서 언급한 상무동사와 상무동사총지점의 설립, 파마양행과의 무역 시도 및 평양 자기회사의 설립취지가 모두 관서자문론을 제창한 이승훈의 실천적 의지에서 기도되었던 것이다. 1900년대 관료출신의 한인 자본가들이 통감부와 결탁하여 시대순응적 경제활동을 펴던 시기에 이승훈을 중심한 이상의 각종 상공업활동과 관서자문론의 제창은 반식민지적 민족경제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민회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국채보상의식 등 민족경제자립의식을 고무하였으며 전통적인 상공업 천시사상을 극복하고 상공업진흥론을 전개하며 모범을 보였다. 또 일본자본에 대항하기 위하여 영세한 민족자본통합의 의지를 보였으며 정직과 신의의 상업윤리를 강조하였으며 예산과 결산을 중시하여 수입과 지출을 명확하게 하였다. 또한 근대적 경영이론과 합자형식의 회사설립 등 기업활동을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민회의 민족경제자립운동은 교육구국운동처럼 목전의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민족자본이 취약한 상태에서 일제의 대자본의 압력을 받고 그에 대항해야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렇지마 신민회가 민족운동으로서 국민에게 민족경제자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유교적 전통사상의 상공업천시관을 탈피할 수 있게 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 기존 상공인에게 합자형식의 기업형태와 근대적 경영방식을 제시하여 근대기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등에서 그 성과를 찾을 수 있다. 더군다나 경제구국을 향한 신민회의 이념과 사상은 1920년대로 이어져 국민의 총력이 경주된 물산장려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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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집위원회, 2000 《島山安昌浩全集》,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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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24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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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34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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