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방의 동학농민전쟁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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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전남지역 동학농민군의 세력분포와 지도자들
3. 1차 봉기와 집강소시기 전남지방의 상황
4. 2차 봉기시 전남지방에서의 주요전투
5. 맺음말

본문내용

최경선은 남평을 거쳐 능주.동복방면으로 후퇴하여 동복 수성군과 접전을 벌여 패배하여 그곳에서 잡혀 나주로 압송되었다.
)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72쪽
이때 동복의 수성군을 지위한 것은 오상윤.오계련.오계엽.오윤술 등 동복의 유력한 향리들이었다.
) 홍성찬, 『한국근대농촌사회의 변동과 지주층』, 지식산업사, 1992, 29∼30쪽
한편 고막원전투에 무안.함평 농민군을 동원하였던 배상옥은 12월 8일 농민군 해산을 선언하고 해남으로 도피하였다가 검거되어 처형되었다.
순천.광양지역의 농민군들은 금구에서 파견된 김인배의 지도하에 순천에 영호대도소를 설치하고 순천의 유하덕, 승주의 정우형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집강소기에는 관측과 타협국면을 이루고 있어 큰 충돌은 없었다. 8월말에 이르러 남원의 김개남 등이 영남으로의 진출을 결의하는 가운데 그 선봉으로서 김인배가 이끄는 순천.광양의 농민군은 9월 1일 하동.진주방면으로 진출하여 이곳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19일에는 양하일이 이끄는 순천의 농민군이 낙안을 장악하였다. 농민군은 이어서 좌수영을 공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진주방면에서 경군과 일본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진주의 농민군은 하동방면으로 후퇴하여, 10월 20일부터 하동의 섬진강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22일 농민군은 큰 피해를 입고 광양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11월 20일 순천의 농민군은 다시 좌수영을 공격하였는데, 좌수사가 여수 앞바다에 정박중이던 일본군함 쓰쿠바호에 구원을 청하여 26일 일본군이 상륙함으로써 농민군은 일본군과 좌수영 연합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사태가 점차 농민군에 불리해지자 12월 6일 순천의 아전들이 중심이 되어 수성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측을 습격, 정우형 을 비롯한 농민군 53명을 죽였다. 8일에는 좌수영의 군대가 순천방향으로 들어와 각면의 접주들을 비롯한 농민군 약 4백여명을 죽였다. 광양에서도 12월 7일 전 군수 김석우와 아전들이 중심이 되어 수성군을 조직, 농민군측을 습격하여 김인배 등 농민군지도부는 사로잡혀 처형되었으며, 이후 며칠동안 각 면의 접주들에 대한 수색과 토벌이 시작되었다. 9일 좌수영군과 하동방면에서 온 일본군은 섬진강변, 옥룡면, 섬거역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농민군세력을 섬멸하였다. 이어서 광양으로 들어간 일본군과 좌수영군은 농민군을 철저히 수색하여 수많은 농민군을 처형한 것으로 전해진다.
) 국사편찬위원회편,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참조
전라도 남부지방에서의 농민군의 최후 저항은 장흥.강진.해남일대에서 시도되었다. 용산면 묵촌의 이방언과 부산면 용반의 이사경에 의해 지도되는 장흥의 농민군세력은 7∼ 8월 자라번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7월 30일 부임한 장흥부사 박헌양은 부임직후부터 유림들과 농민군토벌을 논의하기 시작하는 등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한편 강진 병영에서는 10월 1일 이곳에 설치된 동학도소를 철폐하고 수성소를 설치하는 등 농민군과의 대결태세를 나타냈다. 그런 가운데 공주전투와 나주전투의 연이은 패배소식이 전해지고 이곳 농민군들은 장흥일대를 농민군 최후의 거점으로 확보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에 장흥일대의 농민군 수만명은 11월 26일 이방언.이사경.이인환 등이 회령진(현 보성군 회천면)에 집결하여, 12월 4일 벽사역을 점령하였으며, 다음 날 장흥성을 공격,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장흥부사 박헌양 등 수성군 96명이 전사하였다. 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7일에는 민보군(김한섭 지휘)이 강진을 점령하였으며, 10일에는 병영성을 공격, 점령하였다. 장흥.강진.병영성의 함락소식은 당시 나주부근까지 남하하고 있던 경군과 일본군에 곧 전달되었다. 이에 나주에 머물고 있던 우선봉진의 이규태군은 12일 강진을 거쳐 장흥으로 들어오고, 일본군은 유치방향을 거쳐 15일 장흥으로 들어오며, 순천에 머물고 있던 좌선봉진의 이두황군은 20일 장흥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로써 12일부터 이규태군과 농민군 사이에 1차 접전이 시작되었는데, 농민군은 이규태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장흥성을 내주고 자울재를 넘어 고읍(관산)방면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일 농민군은 다시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로 공격해 들어왔으나 이규태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농민군은 다시 자울재를 넘어 후퇴하여 4,5천명이 옥산리(현 관산읍 옥당리)에 재집결하여 17일 최후의 항전을 벌였으나 여기에서 다시 백여명이 희생되고, 나머지는 천관산쪽을 거쳐 강진, 대구방면으로 흩어져갔다.
) 박맹수, 주 1)의 글 참조.
일단 흩어진 농민군은 다시 해남방면에 집결하여 12월 18일 해남읍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당일 이규태군이 해남읍에 도착, 농민군을 격퇴함으로써 농민군은 뿔뿔히 흩어져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장흥지역에서 300명, 강진지역에서 320명, 해남지역에서 250명의 농민군을 붙잡아 처형하였다고 한다.
) 국사편찬위원회편,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62쪽. 그밖에도 처형된 농민군은 나주부근에서 230명, 함평.무안.영암.광주.능주.담양.순창.운봉.장성.영광.무장 등지에서 각가 30명 내지 5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5. 맺음말
전남지방의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경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전남지방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봄 백산에서의 제1차 봉기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황토재전투, 황룡촌전투의 승리에 큰 구실을 하였다. 또 전주화약 이후에는 각지에 도소와 집강소를 설치하여 전라도 전역이 실질적으로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제2차 봉기때에는 북상하는 농민군 주력의 후방에서 이를 후원하면서 서남해안을 방비하였으며, 농민군이 패퇴하는 상황에 처하자 최후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하였다. 10월 이후의 나주성재공격, 장흥 석대들전투, 광양.하동전투 등에서 농민군은 큰 희생자를 냈다. 경군과 일본군측은 이들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농민군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이미 해산한 농민군들을 철저히 수색하여 엄청난 수를 처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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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7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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