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지방의 3~4세기 고분군 세부편년 금강유역 마한 백제 묘제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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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부지방의 3~4세기 고분군 세부편년 금강유역 마한 백제 묘제 양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김성남, 2003, 「중부지방 3~4세기 고분군 세부편년」, 『백제연구』33,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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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용, 1998, 「3~5세기 금강유역 마한 ․ 백제 묘제의 양상」, 『3~4세기 금강유역의 고고학』, 제22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발표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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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형태 변천 등을 통하여 분기를 설정할 수 있다. 먼저 Ⅰ기(2세기~3세기 중후엽)는 주구토광묘단계로 이 시기 말 무렵까지 마한의 독자성이 확인된다. Ⅱ기(3세기 후엽~4세기 전엽)는 토광묘 이행기로 한강유역의 백제가 이 지역에 일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매납기종이 증가하여 양이부호와 옹 등의 기종이 토광 안에 매납되기 시작하며, 토기상에서 흑회색연질의 기술적 유형이 보인다. Ⅲ기(4세기 중엽~5세기 중엽)는 토광묘, 석곽묘, 석실분 혼용기로 목관묘가 보다 적극 이용되고, 토기상에서도 낮은 기고의 타날된 심발형토기가 주로 매납되며, 한강유역의 백제토기와 동일한 양상을 띠게 된다. Ⅳ기(5세기 후엽~6세기 전엽)은 횡혈식석실분 정착기로 횡혈식석실분은 웅진 천도 후 백제 최고 지배층의 묘제로 채용되고, 여타 지배계층의 주묘제로 정착되며, 수혈식석곽묘도 이 무렵까지는 지역 집단의 묘제로 조영되고 있다. 마지막 Ⅴ기(6세기 중엽~7세기 중후엽)는 횡혈식석실분의 확산기이다.
이러한 묘제 양상 및 분기 내용을 기초로 3세기에서 5세기 무렵의 정체체의 변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구토광묘 조영 세력은 Ⅰ기 말 무렵에 대외교섭권을 상실하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며, 이러한 상황은 3세기 중후반 무렵 국가단계적 성장을 이룩한 한성백제의 영향이 Ⅱ기 무렵 시작되는 것과 연결된다. 이 무렵 백제의 성장 결과가 중부지역으로 파급되어 Ⅱ기 무렵의 상황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Ⅲ기는 Ⅰ, Ⅱ기 보다 단절성이 뚜렷하게 보여지는데, 이는 한성기 백제사회 내부의 구조를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Ⅲ기 무렵 묘제상의 다양성은 집단 내외간의 사회적 복합도가 증가하고 위계화가 고도로 진행되면서 집단간의 활발한 상호 작용을 통해 성장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질문
1. 본 논문에서는 3~5세기 금강유역 마한과 백제의 묘제의 양상 크게 주구묘와 토광묘, 석곽묘 석실분으로 나눠서 보고 있다. 이 시기, 이 지역의 묘제들을 이 세 개의 틀로 다 묶을 수 있는지의 여부와 기타 다른 묘제의 형식은 없는지 궁금하다.
2, 필자는 백제 횡혈식 석실분의 초기 형성과정에 대해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들의 성격이 신라색이 강한 유물상과 구조적 특징에 의해 신라계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신라계가 나타난 까닭과 관련하여 이 시기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을 점유하고 있었던 세력과 신라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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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1.01.21
  • 저작시기201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49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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