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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문학의 변천, 일본문학과 군키모노가타리(군담소설), 일본문학과 토좌일기, 일본문학과 고사기, 일본문학과 만요슈(만뇨슈, 만엽집), 일본문학과 호리 다쓰오, 강호시대 일본문학, 근세시대 일본문학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일본문학의 변천

Ⅱ. 일본문학과 군키모노가타리(군담소설)

Ⅲ. 일본문학과 토좌일기

Ⅳ. 일본문학과 고사기

Ⅴ. 일본문학과 만요슈(만뇨슈, 만엽집)

Ⅵ. 일본문학과 호리 다쓰오

Ⅶ. 강호시대 일본문학
1. 강호시대 소설사
2. 희작

Ⅷ. 근세시대 일본문학
1. 개요
2. 조선의 일본 교화 의도
3. 통신사와 등원성와의 교류

참고문헌

본문내용

시문 교류를 하여, 서장관으로서 글을 짓는 소임을 다한 것이다. 藤原惺窩가 국화를 들고 찾아와 제시한 山顔閑의 韻字로 지은 7언 절구에 대해서 3수나 화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7언 율시를 일컫는 것으로 생각되는)를 들고 찾아왔을 때 다른 운자의 시를 먼저 제시하여 화답을 구하기도 한다. 한편 白大鵬은 독자적으로 교류하지 않고, 허성이 지은 시에 차운하여 藤原惺窩에게 제시함으로써 허성을 보좌하고 있다. 허성은 일본인들과 시문 교류가 많을 것에 대비해 백대붕을 데리고 간 것으로 보인다.
허성과 藤原惺窩의 이 때의 교류는 극히 우호적으로 이루어졌다. 藤原惺窩가 통신사의 문풍에 극히 매료되었음을 다음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네 벗이 같이 한 산(절)에 모여서
얼굴 마주하고 맑은 이야기 나누다보니
소생은 그저 따라가고 싶을 뿐이외다.
따라가서 시를 읊고 책을 읽어 한가하게 지내고 싶소
(四品友朋共一山, 淸談何幸對君顔, 野生唯願相隨去, 句讀書消我閑)
藤原惺窩는 허성과 시문 증답을 하는 가운데 조선의 문풍에 이끌린 나머지 조선에 따라가고 싶은 심정을 피력한 것이다. 藤原惺窩는 허성을 따라 조선에 가서 시를 읊고, 책을 읽으면서 한가롭게 지내고 싶다고 하고 있다. 藤原惺窩가 조선에 따라가고 싶다고 한 것을 단순히 외교 시에 나타나는 인사로만 여길 수 없다. 당시 戰國의 소란이 오래 이어지고 인명이 경시되던 일본의 풍속을 살펴볼 때 조선인의 문풍에 크게 이끌렸음에 틀림없다. 뒷날 藤原惺窩가 임진왜란의 와중에 조선을 피해 중국으로 밀항을 기도했던 것도 이 때의 교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허성이 藤原惺窩를 교화시키게 된 결정적인 것은, 惺窩文集 4권의 증답시와 함께 수록된 柴立子說이다. 이것은 당시 30세의 나이로 불도에 정진하던 藤原惺窩가 허성에게 자신의 호인 柴立에 대해 글을 지어주기를 청하였고, 허성이 이의 요구를 들어서 지은 것이다. 허성은 莊子 達生편에서 연유한 ‘柴立‘을 간파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내가 전에 불교를 살펴보니까 마음 가는대로 맡기고 觀行을 하지 않고, 가고(行) 살고(住) 앉고(坐) 눕고(臥) 뜻에 따라 마음대로 하는 이것을 부처의 妙用이라고 했다. 그러니 무슨 일로 서고(立) 또한 무슨 일을 고루하게 쓸(用) 일이 있겠느냐. 上人은 바야흐로 허공을 넘어서 無相에 들어 말을 타고 曹溪를 따라가서 拈花一笑를 맺으려고 한다. 관행의 기량에 붙어서 그 묘용의 희귀함을 드러내지 않고, 한 구석에 머물러 스스로 호를 붙이기를 柴立이라고 했다.
허성은 ‘柴立‘의 풀이에 의탁하여 藤原惺窩가 의지하는 불교의 세계에 대해 은근한 비판을 보여준다. “허공을 넘어서 무상에 들어 말을 타고 조계를 따라가서 염화일소를 맺을래“는 藤原惺窩의 마음을 읽고는, 현실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하고자 하는 불교의 세계를 주자학적 현실주의 입장에서 나타낸 것이다.
한편, 藤原惺窩가 의지하는 불교와 자신이 의지하는 유교의 세계는 서로 다르다고 하여 상대적인 입장을 밝히면서도, ‘立志‘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불교의 아무 것도 세울 것이 없는 현실과 유리된 입장을 비판한 것이다. 현실을 벗어나 ‘부처의 묘용‘의 경지에 이르러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고자 한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러면서 유가의 이치를 통해 이를 풀이하고 있다.
불씨(佛氏)의 세계를 나는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유가(吾家)의 설로 밝혀 보려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같이 설 수 있다고 하고, 맹자가 이르기를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라고 한 것은, 道로 나가려면 (먼저 뜻을)세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본체를 기르고자 하면 마땅히 그 큰 것을 먼저 세워야 한다. 이것이 진실로 도에 나아가는 핵심(路)이다. 도는 넓고 넓어서 어디에 손을 대야할지 모른다. 뜻을 세워서 방향을 정하고, 다리를 세워서 기초를 다지면 이것이 진실로 도로 들어가는 큰 방법이다.
허성은 立志의 중요함을 누차에 걸쳐 강조한다. 근본을 먼저 세우지 않고는 공을 이루기 어려운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柴立‘의 아무것도 세울 것이 없는 ‘立‘을 설명한 것인데, 일본 불교에서의 현상계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긍정하는 세계관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유교의 현실관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허성은 불교의 교리 자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포용하려는 은근한 입장을 취한다. 자칫 사상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한다.
허성은 완곡하기는 하지만 藤原惺窩의 불교적 세계와 자신의 유가의 입장이 판이한 것을 강조한다. 불교를 지칭하는 것을 삼가고 楊墨과 거리를 두어야하는 유가의 입장에서 자신이 이단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면서도 藤原惺窩에게 유가의 도를 설명한 것을 ‘인자‘의 일이라고 하여, 은근히 藤原惺窩를 교화하는 뜻을 담아낸다. 그러면서도 유학자로서 불교도인 藤原惺窩를 깨우칠 수 없는 것임을 말하면서, 훗날의 추억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柴立子說은 그동안 일본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주목되었으면서도, 정작 藤原惺窩의 개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는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藤原惺窩가 포로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강항을 1598년 만났을 때는 이미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분명하게 밝히고 반불교적 입장을 견지했다.
한편, 藤原惺窩는 1596년 6월 28일 명나라에 건너가기 위해 교토(京都)를 떠나 가고시마(鹿兒島)로 가서 배를 탔지만, 鬼界島에 표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유재란의 포로로 체일하던 강항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藤原惺窩는 1598년 강항을 만남으로써 주자학에 대한 확신을 갖기에 이르고, 그동안 선생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던 여러 문제가 일시에 해소된다. 특히 藤原惺窩가 강항을 만난 것은 애타게 선생을 찾던 시기인 만큼 그 교류의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김종덕 외(2000), 일본문학의 흐름Ⅰ, 한국방송대학교 출판부
박이정(1998), 명문으로 읽는 일본문학·일본문화, 도서출판 박이정
암파서점편집부 편저(1999), 일본고전のすすめ
일본문학사 소서 심일 고려원 1996
小學館, 일본고전문학전집 토좌일기, 昭和 6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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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3.17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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