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정당화][민족주의][통일운동][실체종교][텔레비전][종교 관련 정책]종교의 의미, 종교의 정당화, 종교의 민족주의, 종교의 통일운동, 종교와 실체종교, 종교와 텔레비전, 종교 관련 정책 분석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종교][정당화][민족주의][통일운동][실체종교][텔레비전][종교 관련 정책]종교의 의미, 종교의 정당화, 종교의 민족주의, 종교의 통일운동, 종교와 실체종교, 종교와 텔레비전, 종교 관련 정책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종교의 의미

Ⅱ. 종교의 정당화
1. 주도된 전략
2. 경제적 전략들
3. 친족전략
4. 법-정치적 전략들
5. 교육-문화적 전략들
6. 억압전략들

Ⅲ. 종교의 민족주의

Ⅳ. 종교의 통일운동
1. 자주ㆍ평화ㆍ민족대단결
2. 통일의 첫걸음 : 용서와 화해
3. 교류와 협력 - 상호주의에서 인도주의로
4. 평화로 가는 길 : 정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
5. 합의 통일로 가는 길

Ⅴ. 종교와 실체종교

Ⅵ. 종교와 텔레비전

Ⅶ. 종교 관련 정책

참고문헌

본문내용

종교 관련 정책
우리나라가 현재 실질적인 면에서 공인교 정책을 시행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미군정은 종교관련 법규의 개폐와 종교관련 적산의 배분을 이용하여 기독교 위주의 종교정책을 시행하였다. 미군정청은 1948년 5월 남조선과도정부의 건의로 ‘향교재산관리에 관한 건’이라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도별로 향교재단을 설립하여 향교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법에는 각 도별 향교재단의 이사 중의 1인은 도지사가 추천하는 도공무원으로 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유교의 재산이 지방별로 유림에게 귀속되기는 하였으나 지방의 유림 재산이 도의 감독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지사가 추천하는 도공무원 1인을 이사로 선정한다는 조항은 1962년에 와서야 폐기되었다.
불교는 1946년 7월과 8월에 군정장관에게 사찰령의 철폐를 신청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 8월 입법의원은 ‘사찰재산임시보호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의 주요 취지는 종교의 자유를 가로막는 사찰령을 폐지하고 사찰의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자는 데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은 이 법에 의해 일본불교의 적산이 조선불교라는 일개 종교단체로 귀속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이유로 이 법의 인준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만든 사찰령은 1962년까지 존속되었고 바로 이 사찰령에 의해 이승만은 1950년대 중반에 소위 불교계의 정화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그 당시 불교계 내부의 비구, 비구니의 갈등은 사실 불교계 내부의 일로 정부가 관여할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었다.
미군정 당시 일본종교의 적산은 막대한 것이었다. 미군정 당시 일본종교의 적산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귀속재산 처리와 관련된 법에 ‘공인된 교화단체’라는 구절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아 종교관련 적산이 대부분 기독교에 불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당시 미군정 당국으로서는 남한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종교의 귀속재산도 그러한 맥락에서 처리되었을 것이다. 광복 후 10년간 2천여 개의 개신교 교회가 신설되었는데 그 중 90% 이상이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의 교회였다. 이들 피난민의 교회 설립에 일본종교의 귀속재산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편 미군정은 1945년 10월에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제1공화국이 미군정의 이러한 결정을 그대로 따른 것은 물론이다. 또한 기독교는 1947년 3월부터 매 일요일마다 서울방송을 이용하여 기독교의 복음을 전국에 전파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 경성방송의 후신인 서울방송은 그 당시 國營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기독교가 서울방송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은 대통령의 취임식 선서를 개신교식의 기도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1년 2월에는 대통령령에 의해 軍宗制度를 시행하였다. 물론 이 군종제도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개신교와 천주교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군종 창설 당시 국군의 기독교인 비율이 5% 정도에 불과하였으나 1956년에는 15%까지 상승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미군정에서 시작된 기독교 위주의 공인교 정책에 힘입어 미군정 당시 남한 전체 인구의 2-3%에 불과하였던 기독교(천주교, 개신교)가 1960년에는 남한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제3공화국 이후 기독교 위주의 종교정책은 약간의 변화를 맞이하였다.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불교가 군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1975년에는 석가탄신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제3공화국 이후 불교계가 결집된 힘을 과시하였다는 점과 함께 종교 간의 평등이라는 정책적인 면이 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서 현재 우리나라는 개신교, 천주교, 그리고 불교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정책적인 면에서 혜택을 받는 공인된 교화단체, 즉 공인교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요즈음 종교계에 등장하는 문제들은 모두가 바로 이러한 종교정책의 허점에서 비롯한다. 단군성전과 장승 건립을 둘러싸고 제기된 종교계의 갈등, 성직자들이 소득세를 내야 하는지의 문제, 종교계에서 설립한 중·고등학교에서 특정의 종교를 가르칠 수 있는지의 여부, 교회 건물에 대한 건축법 시행령의 개폐, 종교재산에 대한 종합토지세 부과의 여부, 소위 시한부 종말론자들에 대한 사법적인 제재, 지방의 MBC가 매 일요일마다 특정 목사의 설교를 방송하는 문제, 회사나 대학에 취직할 때 특정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지의 여부 등은 모두 특정의 종교들이 그동안 너무 과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과보호는 상식을 넘어서는 권리 주장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정한 종교의 자유와 종교 간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종교법의 제정으로 일관성 있는 종교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묘하게도 공인교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종교들은 현재 종교법의 제정에 반대하고 있다. 종교법의 제정으로 종교의 자유가 침해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법의 제정으로 소수인들의 종교가 다수인들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며,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종교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사적으로 볼 때 다수인들의 종교는 항상 소수인들의 종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과 바로 그 소수인들로부터 시작한 종교가 역사를 움직여 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참고문헌
미구엘 세라노(Miguel Serrano), 박임(1986) : 헤세와 융(Herman Hesse & C.G. Jung), 정신세계사
박이문 :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 철학
이만열(2001) : 한국 기독교와 민족통일운동, 서울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원규(1987) : 종교의 세속화 : 사회학적 관점, 서울 : 대한 기독교 출판사
정웅섭(1991) : 기독교교육의 이론과 실제, 대한기독교서회
최운식·김명자·이정재·장장식·홍태한 공저(1998) : 한국 민속학 개론, 민속원

키워드

  • 가격5,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11.04.21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7022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