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본 자료는 6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해당 자료는 6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6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머리말
2. 국내의 국민과 연계활동
3.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추진
4. 외교활동
5.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6. 군사활동
7. 맺음말

본문내용

과의 공동작전에서 적극적으로 나섰다. 1943년 8월 광복국은 영국군과 공동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인도 미얀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였다. 1945년 제2지대와 제3지대에서 선발된 요원들은 미국 전략첩보기구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서 국내 진공을 위한 군사 훈련을 받았으나, 해방으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해방 당시 광복군의 수는 700명을 넘었다. 해방 직후 임시정부는 일본군으로 끌려왔던 한국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켜 귀국을 추진하였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7. 맺음말
독립운동은 빼앗긴 국토를 되찾고 이 땅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운동이었다. 3 1운동과 같은 전 민족적 운동을 일으켜 한국인의 존재 가치를 세계에 알렸고, 스스로 군주제를 청산하고 민주공화제를 주창하면서 근대화도 전진시켜 나갔다. 그리고 3 1운동의 주권 의지로 수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근대사에서 민주공화제를 정착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임시정부의 수립은 절대 독립을 집약한 표상의 실체였다. 주권은 최고 절대 유일 불가분의 존재이기 때문에 주권의 존재인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정부 조직을 정비하면서 국내외 동포를 관할하는 조직을 설치해 나갔다.
나라를 잃은 상태여서 부득이 국내가 아닌 해외에 세워야 하였으나, 임시정부는 27년간 민족의 구심체로서 광복의 그 날까지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한국 민족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서 국제사회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이 같은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미군정의 견제로 임시정부가 간판을 내걸지 못한 채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때 온 국민이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뜨겁게 환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국민의 가슴속에 민족의 표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하게 된 배경은 일제하에 한민족이 전개한 최대 규모의 항일투쟁이었던 3 1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3 1운동은 일제치하의 2천만 한반도인은 물론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지에서 나라를 잃고 살아온 2백만 해외 동포들도 함께 참여한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 이와 같은 독립운동은 자연히 국가차원의 조직적인 독립투쟁을 염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의 여망에 따라 각계각층의 한인독립투사들은 정부수준의 통치기관인 자주정부수립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그 구심체가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임시정부는 상해시대(1919~1932), 이동시대(1932~139), 중경시대(1940~1945)를 거치면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임시정부는 시기에 따라 왕성하게 독립운동을 대표하고 이끌어 나갔다. 임시정부는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27년간이나 독립운동의 중심축으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준비에 힘쓴 사실에 대해 그 역할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임시정부는 한국인의 이념적 구심체로서 독립운동의 통합을 시도하였다는 점, 실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8 15 해방까지 단절되지 않고 존재한 유일한 기구였다는 점, 또 국제적으로 한국인의 독립의지가 감상이 아닌 현실적인 요구라는 것을 보여준 실체로서 존재하였다는 점 등에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정신적인 주권국가의 명맥을 이어 온 임시정부는 헌법전문에서 그 정당성과 법통을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당국이나 국민으로부터 이에 상응한 인식과 대접을 받지 못한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임시정부의 실질적 수호자요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 김구의 마지막 거처였고 환국 후 임시정부관계자들의 회합장소였던 경교장이 서울시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면서도 민간병원의 의사휴게실로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나(경교장은 현재 삼성 강북병원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뒤늦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발족하는 상황들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모든 사람과 단체들이 이에 상응한 평가와 예우를 받고 있는지, 임시정부 외에도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일제강점기에 투쟁하고 희생한 개인과 단체들도 동일선상에서 역사적 평가와 조명을 받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에 참여한 선열들이 피땀 흘려 건설하려 했던 자주, 독립, 통일을 온전히 이룩하기 위하여 대내적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변함 없는 건국이념인 민주한국의 건설과 국민주권의 실현에 진력하여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창립총회에 보낸 메시지를 적으며 글을 맺는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중심으로서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고 조국 광복을 이뤄냈습니다. 참여정부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랑스런 법통 위에 서 있습니다.
역사는 미래를 세워가는 주춧돌입니다. 있는 그대로 밝히고 올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랑스런 역사는 따라야할 이정표로, 안타까운 역사는 반성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의와 희망이 넘치는 내일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미뤄서는 안됩니다. 이제라도 역사를 바로 잡아서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가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념사업회의 출범은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임시정부를 기념하는 일은 우리의 자긍심을 살려 당당하고 힘 있는 나라를 만들어 가는 정신적 토대가 될 것입니다.“
참고문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대한민국의 기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2009
김희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구』, 지식산업사, 2004
유영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성과 및 평가」, 『論文集 vol.53』, 2008
한시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정보활동」, 『한국근현대사학회 vol.15』, 2000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광복군」, 『역사실학회 vol.15, 16』, 2000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정책과 그 실제」, 『동국사학회 vol.19』, 1986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우합작운동」, 『역사연구 vol.58, 59』, 1999
  • 가격2,000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11.10.13
  • 저작시기2011.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0794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