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사의재>라고 명명했다.
-1802년(순조 2), 41세
넷째 아들 농장이 요절했다.
-1803년(순조 3), 42세
봄에『단궁잠오』, 여름에『조전고』, 겨울에『예전상의광』등을 짓는 등 본격적인 학문에 나서는 한편『주역』을 깊게 연구했다. 유명한 시 『애절양』과 『사의재기』등도 지었다.
-1804년(순조 4), 43세
봄에 2천 자로 된『아학편훈의』를 지었다.
-1804년(순조 4), 43세
여름에『기해방례변』3권을 완성했고, 겨울에 학연이 오자 보은산방에서 『주역』,『예기』를 가르쳤다.
-1806년(순조 6), 45세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1807년(순조 7), 46세
5월에는 정약용의 장손 대림이 태어났고, 7월에는 정약전의 아들 학초가 사망했다.
그 소식을 듣고 <형의 아들 학초 묘지명>을 썼다. 『상례사전』50권을 완성했다.
-1808년(순조 8), 47세
봄에 강진 도암면 만덕리 다산의 산 밑에 있는 윤단의 산정으로 옮겨『다산문답』1권을 지었다. 겨울에『주역심전:주역사전』24권과 『독역요지』18칙, 『주역사해』,『주역서언』등 주역에 관한 책을 집중적으로 저술했다.
-1809년(순조 9), 48세
『시경강의산록』등을 지었다.
-1810년(순조 10), 49세
『시경강의보』등을 지었다.
-1811년(순조 11), 50세
『아방강역고』등을 지었다.
-1812년(순조 12), 51세
『민보의』,『춘추고징』등을 지었다.
-1813년(순조 13), 52세
『논어고금주』40권을 지었다.
-1814년(순조 14), 53세
『맹자요의』『대학공의』『중용자잠』『중용강의보』『대동수경』등을 지었다. 정약전은 정약용이 해배된다는 소문을 듣고 흑산도까지 오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이도로 이주했다.
-1815년(순조 15), 54세
『심경밀험』『소학지언』을 지었다.
-1816년(순조 16), 55세
『악서고전』12권을 지었다. 6월 둘째 형 정약전이 내흑산 우이도에서 사망했다. <선중씨정약전묘지명>을 지었다.
-1817년(순조 17), 56세
『상의절요』『경세유표』를 지었다.
-1818년(순조 18), 57세
『목민심서』48권을 지었다. 8월에 귀양이 풀려서 강진을 떠나 고향 마재에 돌아옴.
-1819년(순조 19), 58세
『흠흠신서』『아언각비』등을 저술했다.
-1821년(순조 21), 60세
『사대고례산보』를 지었다. 맏형 약현 사망.
-1822년(순조 22), 61세
회갑을 맞아 스스로 [자찬묘지명]을 지었다. 이가환, 권철신 등 신유박해 때 사형당한 남인들의 묘지문도 짓기 시작했다.
-1823년(순조 23), 62세
『산행일기』『산수심원기』등을 지었다. 9월에 승지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취소 되었다.
-1827년(순조 27), 66세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익종)가 정약용 등을 등용하려 하였으나 윤극배가 상소해 정약용을 무함했으나 무고로 드러났다.
-1830년(순조 30), 69세
효명세자가 위독하자 정약용을 부호군에 단부해 약을 쓰게했으나 조제하기 전에 효명세자가 사망했다.
-1834년(순조 34), 73세
『상서고훈』과 『지원록』을 개수해 21권으로 합편함. 가을에『매씨서평』10권 완성. 순조가 위독하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대궐에 도착하기 전 순조가 사망했다.
-1836년(헌종 2), 75세
회혼일인 2월 22일 진시(辰時)초에 마재 자택 정침에서 조용히 서거했다.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자좌지원에 안장되었다.
-1910년(융희 4)
특별히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을 추증하고 ‘문도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참고문헌
한승원의 『다산』
정규영의 『사암선생연보』
이덕일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절충하여 작성함.
-1802년(순조 2), 41세
넷째 아들 농장이 요절했다.
-1803년(순조 3), 42세
봄에『단궁잠오』, 여름에『조전고』, 겨울에『예전상의광』등을 짓는 등 본격적인 학문에 나서는 한편『주역』을 깊게 연구했다. 유명한 시 『애절양』과 『사의재기』등도 지었다.
-1804년(순조 4), 43세
봄에 2천 자로 된『아학편훈의』를 지었다.
-1804년(순조 4), 43세
여름에『기해방례변』3권을 완성했고, 겨울에 학연이 오자 보은산방에서 『주역』,『예기』를 가르쳤다.
-1806년(순조 6), 45세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1807년(순조 7), 46세
5월에는 정약용의 장손 대림이 태어났고, 7월에는 정약전의 아들 학초가 사망했다.
그 소식을 듣고 <형의 아들 학초 묘지명>을 썼다. 『상례사전』50권을 완성했다.
-1808년(순조 8), 47세
봄에 강진 도암면 만덕리 다산의 산 밑에 있는 윤단의 산정으로 옮겨『다산문답』1권을 지었다. 겨울에『주역심전:주역사전』24권과 『독역요지』18칙, 『주역사해』,『주역서언』등 주역에 관한 책을 집중적으로 저술했다.
-1809년(순조 9), 48세
『시경강의산록』등을 지었다.
-1810년(순조 10), 49세
『시경강의보』등을 지었다.
-1811년(순조 11), 50세
『아방강역고』등을 지었다.
-1812년(순조 12), 51세
『민보의』,『춘추고징』등을 지었다.
-1813년(순조 13), 52세
『논어고금주』40권을 지었다.
-1814년(순조 14), 53세
『맹자요의』『대학공의』『중용자잠』『중용강의보』『대동수경』등을 지었다. 정약전은 정약용이 해배된다는 소문을 듣고 흑산도까지 오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이도로 이주했다.
-1815년(순조 15), 54세
『심경밀험』『소학지언』을 지었다.
-1816년(순조 16), 55세
『악서고전』12권을 지었다. 6월 둘째 형 정약전이 내흑산 우이도에서 사망했다. <선중씨정약전묘지명>을 지었다.
-1817년(순조 17), 56세
『상의절요』『경세유표』를 지었다.
-1818년(순조 18), 57세
『목민심서』48권을 지었다. 8월에 귀양이 풀려서 강진을 떠나 고향 마재에 돌아옴.
-1819년(순조 19), 58세
『흠흠신서』『아언각비』등을 저술했다.
-1821년(순조 21), 60세
『사대고례산보』를 지었다. 맏형 약현 사망.
-1822년(순조 22), 61세
회갑을 맞아 스스로 [자찬묘지명]을 지었다. 이가환, 권철신 등 신유박해 때 사형당한 남인들의 묘지문도 짓기 시작했다.
-1823년(순조 23), 62세
『산행일기』『산수심원기』등을 지었다. 9월에 승지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취소 되었다.
-1827년(순조 27), 66세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익종)가 정약용 등을 등용하려 하였으나 윤극배가 상소해 정약용을 무함했으나 무고로 드러났다.
-1830년(순조 30), 69세
효명세자가 위독하자 정약용을 부호군에 단부해 약을 쓰게했으나 조제하기 전에 효명세자가 사망했다.
-1834년(순조 34), 73세
『상서고훈』과 『지원록』을 개수해 21권으로 합편함. 가을에『매씨서평』10권 완성. 순조가 위독하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대궐에 도착하기 전 순조가 사망했다.
-1836년(헌종 2), 75세
회혼일인 2월 22일 진시(辰時)초에 마재 자택 정침에서 조용히 서거했다.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자좌지원에 안장되었다.
-1910년(융희 4)
특별히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을 추증하고 ‘문도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참고문헌
한승원의 『다산』
정규영의 『사암선생연보』
이덕일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절충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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