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해어화사][춘향뎐][춘향전][기생][조선시대]조선해어화사와 춘향뎐(춘향전)을 통해 본 기생 분석, 조선해어화사와 춘향뎐, 춘향전을 통해 본 기생에 관하여(조선해어화사, 춘향뎐, 춘향전, 기생)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조선해어화사][춘향뎐][춘향전][기생][조선시대]조선해어화사와 춘향뎐(춘향전)을 통해 본 기생 분석, 조선해어화사와 춘향뎐, 춘향전을 통해 본 기생에 관하여(조선해어화사, 춘향뎐, 춘향전, 기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개요
2. 책과 저자 소개

Ⅱ. 본론
1. 신라시대
2. 고려시대
3 조선시대
가. 조선시대의 기생
나. 조선사람들과 기생
다. 기생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것들
라. 기생의 특징
마. 기생의 능력과 분류
4. 춘향전 줄거리
5. 영화 춘향전과 조선해어화사에서 본 기생의 모습 비교
가. 공통점
나. 차이점

Ⅲ. 결론

Ⅳ. 부록

본문내용

오는 기생 가운데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절개를 나타냈던 논개를 비롯하여여러 예들을 기록으로 찾아볼 수 있었다. 춘향이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하면서 “사또님 대부인 수절이나 소녀 춘향 수절이나 수절은 일반인데 수절에도 상하가 있소!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요 열녀(烈女)는 불경이부절(不敬二夫節)이라 사또도 국운이 불행하여 왜국이 집정하면 무릎꿇고 두 임금을 섬기리까”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또한 심한(몽둥이로 정강이를 맞는)고문에도 끝까지 수절하는 모습에서 절개(節槪)를 볼 수 있었고, 어미 월매를 생각함에 있어서 효성스런 모습도 보여준다.
(3) 당시 신분제도가 낳은 불행한 지위로서의 기생
당시 조선시대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녀간의 내외법이 철저하게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그러나 기녀는 이러한 유교적인 제약에서 벗어난 사람이었고, 오히려 사대부들을 상대하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들을 찾는 남성이 없을 때 그들은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찾는 남성이 그들 삶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양반과 기생은 동등한 위치가 아니고, 따라서 사랑 받다가도 한순간에 버려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바심을 내고 애타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 남아있는 그들이 쓴 여러 시조에서 떠난 임에 대한 원망과 사랑의 마음을 읽어볼 수 있다. 춘향전에서도 이러한 당시의 시대상이 드러난다. 변사또가 기생 점고를 할 때 기생들이 앞다투어 서로 잘 보이기 위하여 애를 쓰는 장면에서 그런 점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춘향이가 이도령과 인연을 맺기 전에 자신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불망기를 써달라고 하는 장면에서 당대의 기녀의 사회적 지위와 그들의 심리적 고충을 충분히 읽어볼 수 있다.
나. 차이점
(1) 춘향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관기의 신분이다
관기는 천민의 신분으로 관에서 소속된 신분이다. 즉 개인의 의지보다 연회나 관의 필요에 따라서 사용되는 신분이었다. 종모법에 따라 어머니가 기생이면 그 아들은 노비가 되고 그 딸은 역시 기녀가 되었다. 춘향전에서 춘향 모 월매는 관기다. 따라서 아직 기적에 오르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춘향 역시 천인이자 관기의 신분이다. 이도령을 위해 기생 신분의 춘향이 반가의 부녀처럼 정절을 지킨다는 것은, 실상 반드시 관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관기의 의무를 벗어난 행동이 되어버린다. 시대적 배경으로 춘향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분수를 잊어버린 것이 되며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의 반항이 되는 것이다. 또한 후에 춘향의 아름다운 정조와 행실 덕분에 정실부인이 된다는 것은 반상의 구분이 명확한 유교적인 당시 질서로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2) 기생은 창녀가 아니다.
관기는 관의 부름에 따라 움직일 의무가 있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연회에서 양반들 가운데서 시조를 읊고, 가야금을 타고, 춤을 추고, 흥을 돋구는 역할을 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의무이다. 엄밀히 말해서 창기와 기녀는 구분되었다. 몸을 파는 것은 창기들의 역할이지만 예술인으로서의 기량을 발휘하는 것은 기녀였다. 실제로 황진이, 매창, 홍랑과 같은 기생들은 이름난 명기로서 당대 양반들에게도 높이 평가받았다. 그들은 선비들과 풍류를 즐기고, 한시를 남기고, 음악을 전하고, 당시의 서민들의 생각과 감정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등 업적이 대단히 크다. 그러나 창기와 기녀의 구분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모호해지게 된다. 춘향전에서 변사또가 부임하자마자 죽 기생들을 불러놓고 기생 점고를 하고, 수청을 들 기생을 고르고, 춘향이 수청들지 않는다고 죽이려하는 등의 장면들을 보면서 기녀는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창녀이고 양반의 노리개였다는 오해를 살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Ⅲ. 결론
우리에게 기생이라 하면 왠지 어둡고, 말하기가 꺼려지는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종국엔 매춘 여성의 이미지가 떠오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또 황진이, 논개와 같은 기녀들에 대해 들어왔던 사실들을 떠올리면 기생들이 상당한 교양을 갖추었고 정신적인 품격을 지녔다는 점을 어렴풋이 생각해낸다. 그 상반된 이미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조선해어화사와 춘향전을 통해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부정적인 이미지는 조선 후기에 사회가 불안해지면서 기생과 창부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일제 강점기와 근세를 거치면서 요정 정치가 행해지면서 기생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들 뇌리에 담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생에게 이런 부정적인 면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알 수 있었다. 즉 이능화 선생의 말처럼 기생은 봉건 관료 사회의 천인 계급으로 작희(作戱)의 대상물이 되어왔지만 전통문화의 계승자로서 그들로 하여 예술과 문화발전이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때는 의기가 나왔고, 일제 때는 항일기생이 있었으며, 특히 그들이 남긴 시작품은 우리 문학사에 크게 공헌했다. 따라서 현대의 매춘여성을 기생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하겠다.
남성중심의 유교사회에서 남성들을 위한 악기, 유흥상대가 되다 보니 아이러니 하게도 그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과 달리 글을 배우고 또 그 절절한 마음을 문학으로 표현할 수 있었지 않나 생각을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든다. 또한 그들의 이와 같은 어쩌면 비극적이고, 역설적인 삶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음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다.
‘말하는 꽃’ 기생이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갈취하는 남성 지배 사회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지만 그들의 삶도 분명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었고 따라서 쉬쉬하며 덮어두기보다는 보다 밝은 곳에서 더 많은 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그들의 긍정적인 측면을 재고,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게 함은 물론,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우리의 역사에서 여성의 중요한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Ⅳ. 부록
<가야금과 양금을 합주하는 기생>
<관기>
<관기의 성장>
<기생들의 검무>
<기생학교의 학생들>
<란을 치고 있는 기생들>

키워드

  • 가격6,5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12.04.10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3908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