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후기, 조선통신사 파견 목적, 조선 통신사를 통해 본 일본과 우리나라에 외교관계, 루트,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국교재개, 조선통신사 폐지 이유, 조사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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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조선전기/후기
조선통신사 파견목적(일본/우리나라)

2. 조선통신사를 통해본
일본과 우리나라의 외교관계

3. 루트

4. 임진왜란이 후 일본과 국교재개
대마도의 역할

5. 대마도 역지 빙례

6. 정한론

7. 조선통신사 폐지 이유

본문내용

’가지 개방하였으나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일본국왕사가 한양까지 다녀간 경로를 이용해 조선에게 큰 타격을 주 자 후기에는 ‘동래’까지만 허락함.
- 전기에 일본은 ‘도쿄’까지 그 통신사의 경로를 개방하였고 후기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죽음으로 인한 참배요구로 인해 ‘니코’까지 그 경로가 이어짐.
4. 임진왜란이 후 일본과 국교재개/대마도의 역할
- 임진왜란 후 일본이 조선에게 국교재개를 요청하자 조선이 일본에게 3가지 조건을 요구함
〓》조선이 국서개작과 정릉, 선릉의 훼손 범인으로 어린아이를 보낸 것을 문 제삼지 않은 것은 당시 시대가 실제 사실 보다는 명분을 중요시하는 시대였 기 때문이다.
조선통신사의 중요성과 함께 도쿠가와 막부 또한 대마도의 국서 개작을 알 고 있었지만 가벼운 처벌로 일을 끝낸다. 이는 조선통신사 사업이 막부의 권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5. 대마도 역지 빙례
- 도쿠가와 장군의 직위승계를 축하하는 최후의 빙례. 일본 국내로 통신사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1811년의 빙례는 그 전까지의 빙례와는 크게 달랐다. 빙 례 장소가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대마도였으며 통신사의 규모 또한 대폭 축 소되어 총인원이 328명이었다.
이렇게 장소와 규모가 축소된 까닭은 양국의 국내사정 때문이었다.
양국의 국내 사정
조선- 대규모 기민 발생, 양반 계층의 당쟁격화와 기강해이가 만성화
일본- 대기근으로 인한 민란이 자주 발생, 쌀값 폭등,
폭동 확산, 노숙자들의 대규모 소요
아라이 하쿠세키의 주장
18C 일본의 국학자. 통신사 접대에 대한 경제적 부담과 흉년으로 일어난 민란으로 통신사 접대 잠시 멈출 것을 주장
통신사 중단
통신사 초청의 무기 연기를 교섭
대마도 빙례
아라이 하쿠세키의 제안. 경비 절감과 대등한 관계를 철저히 하는 것이라면 양국의 중간 지점인 대마도가 적당하다는 의견1811년 ‘역지번역’으로 실질적인 마지막 통신사임
통신사 접대 복구
18C 일본의 국학자인 아메노모리 호슈의 주장으로 아라이의 주장을 실각시키고 통신사의 접대를 다시 복구 시킨다.
메이지 유신
1868년. 메이지유신이 일어나 정권이 교체
막부가 몰락하여 이들의 외교도 끝남
- 1811년(순조 11), 대마도 빙례가 거행되었다.
- 이때의 빙례 거행 개요를 보면 '통신사의 규모는 300명, 사신은 정사와 부사 2명으로 하고, 사신의 선박도 328명을 실은 4척에 그친다.
- 일본 측은 4위 이상의 직위를 지닌 정사와 부사로서 대마도에 건너간다.
- 빙례는 대마부중의 소 번주 저택에서 행하고, 의식은 에도 저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집행한다.
- 기타 행사들도 에도에서의 행사에 준한다, 마상재·전악·급창·장창의 시행은 폐지한다.' 등이었다.
- 여기에 필요한 경비 총액은 38만 3천냥 남짓이었다.
- 종래의 빙례 비용이 100만 냥이었던 것으로 보기 때문에 대강 그 40%에 미친 셈이었다.
- 대마도 빙례에서 아메노모리 호슈와 아라이 하쿠세키의 생각을 보면, 두 학자 모두 조선통신사와 관계 깊은 유학자인데, 한쪽은 선린우호를 주장하며 발전시킨 사람인 반면에 다른 한쪽은 조선에 대한 멸시를 깔고 막부의 재정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통신사의 대우을 격하했던 동시대의 인물이다.
6. 정한론
ㆍ정한론이란?
- 정한론은 187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 정계에서 강력하게 대두된 한국에 대한 공략론을 말한다.
ㆍ정한론의 대두와 강화도 조약
- 1868년(고종 5) 일본 정부는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조선정부에 통고하고 양국의 국교회복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 왔다.
- 척왜정책(斥倭政策)을 추진했던 대원군 집정은 서계(외국문서)의 격식이 이전과 같지 않고 도서도 조선정부가 인각(印刻)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였다.
- 이 일을 시작으로 조선과 일본은 외교 문서의 수리를 놓고 1년을 논박했다.
- 일본은 조선 외교를 전담하여 온 쓰시마도주 소오씨를 해임하고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조선 측이 거부하여 타결을 보지 못했다.
- 1872년에는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왔지만, 조선 측이 '왜사가 군함을 타고 오다니 상대해 줄 수 없다'고 하여 수개월 동안 체류하다가 돌아갔다.
- 이 과정 속에서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대두하게 되었고 1873년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이다가키 다이스케,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의 강경 정한론자들이 사이고 다카모리가 견한대사가 되어 외교적 타결을 시도하고, 여의치 않으면 조선에 파병하여 무력행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 그러나 이와쿠라를 포함한 많은 각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논쟁을 계속하였다.
- 그러다가 태정대신의 대행이 된 이와쿠라가 정한(征韓) 반대를 결정하여 견한사절건은 무기 연기되었다.
- 그러나 그 당시 일본정부 내에서 정한론에 맞섰던 이와쿠라 등의 비정한파(非征韓派)가 주도한 정권이 1875년 운요호를 보내 강화도를 침공하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점은 그들이 본질적인 비정한파는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7. 조선통신사 폐지 이유
- 일본에서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면서 정한론(征韓論)이 득세하게 되어 통신사 파견이 단절되기에 이른다.
-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을 왕래하던 근세 한일관계는 평화적,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 조선 통신사는 1764년을 마지막으로 에도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일본에선 이후로 정한론적인 사고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 1811년 쓰시마를 끝으로 조선은 더 이상 통신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186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서 일본에서는 조선과 아무런 외교적 알력이 없었는데 조선을 무력(武力)으로 공격하자는 여론이 발생한다.
- 이를 '정한론(征韓論)'이라고 일본 측의 사료는 표현하고, 일본인 연구자들도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 그러나 '정(征)'이라는 표현은 상급 국가의 하급 국가에 대한 정벌이라는 표현이므로 일본의 주관적 표현일 분 학문적,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다. '침한론(侵韓論)'이라는 표현이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자료>
나카오 히로시(仲尾 宏) 지음/ 유종현(柳種玄) 옮. 한울.『조선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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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7.17
  • 저작시기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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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65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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