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전후의 우리나라의 시대적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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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복 전후의 우리나라의 시대적상황!!!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일제강점기 1910~1945
(1)시대적 상황
대한제국 정부의 무능과 부패, 그런 정부를 무너뜨리고 국민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국민적, 역사적 조선,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주의와 이에 대한 제국주의 열강의 원조 및 승인이 결과적으로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적인 식민지 역사를 만들어낸다.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는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10년 한일합방부터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의 제 1기는 헌변경찰통치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조선 총독부가 설치되면서 무단통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통치의 목적은 독립운동의 기운을 말살하려는 강력한 제재조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 사업과 회사령의 반포 등으로 수탈이 이루어졌다. 3.1운동 이후 1930년까지의 시기를 제 2기로 보는데 이때는 표면적으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으나 더욱 심각한 식민정책으로 볼 수있다.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보통경찰제, 고등경찰제를 실시하고 일부 언론을 허용하는 등의 통치방식을 취했으나 이는 한민족간의 이간과 분열을 획책하고자하는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 토지조사이후 산미증식 계획을 시행해 경제적 수탈을 강화해갔다. 1931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의 3기에서는 노골적인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다.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 황국시민화 정책을 통해 한반도의 완벽한 식민지화를 이루려했다. 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은 극에 달하고 2차 세계대전의 참전과 더불어 한반도를 일본의 병참기지화하려했다. 일제 식민시기동안 한반도 내부와 만주, 중국일대, 그리고 일본본토와 그 이외의 지역에서 끊임없는 민족적 독립운동은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국내에서의 비밀결사 조직, 국외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과 3.1운동 이후의 사회주의 유입, 신간회와 근우회의 활동, 임시정부활동, 무장독립전쟁 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자발적 노력과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한국은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광복을 맞는다.

(2)예술적 환경
시대의 파멸과 함께 드리워진 일제 통치는 우리 문화의 흐름에 있어서의 그들의 부당한 문화정책의 제도적인 일방적 조건아래에서 전면적인 변신을 거듭하여 나갔다, 당시 회화가 조선조말엽에 이어져 온 청대 매너리즘이 고답적 관념의식이 상당수 작가들의 의식과 필묵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으며 일부는 전통적인 답습방식을 통한 화보 중심의 학습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암흑기이후 유가적 관습의 사습 방법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분방한 외래사조의 수용이나 광역한 미술계의 식견을 넓혀나가거나 학습의 기회를 갖기도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회화양식을 강요받게 되는 단일창구의 답답한 사각시대였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1918년 최초의 작가협회 서화협회가 조석진, 안중식, 이도영, 고희동 등 13명에 의해 발족되었고 이 단체는 신구서화와 동서미술의 연구 및 후진 양성이 목적이었다. 회장에는 안중식이 선출되고. 1919년 안중식이 타계 1920년에는 조석진 타계하였다. 1921년 연말, 총독부는 민족사회의 서화협회전과 전람회 개최를 약화시키기 위해 '조선에서의 미술의 발달을 비보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총합 미술전을 해마다 개최한다는 조선 미술전람회 규약을 발표하였다.
조선 미술전은 1922년 (1부 동양화, 2부 서양화, 3부 서)열리게 된다. 이것은 경쟁심리와 명예욕을 자극하였다.
동연사는 이상범,노수현,변관식,이용우 4명이 발족하였는데 이는 일본화풍 배격과 중국 풍으로의 해방의 의지로서 우리 것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신예들의 작품경향과 표현수법은 크게 채색표현주의, 수묵표현주의, 심상표현주의로 나뉠 수 있다. 1936년에는 조선미술원이 과거의 조선미술 계승과 근대 세계미술의 섭취라는 목표를 가지고 창립되었다.

본문내용

자율성을 어느 만큼 인정하는가의 문제다. 작가에게 많은 자유가 주어지고 사회 또한 그러한 변화를 인정할 만큼 오픈 되어 있을 때 소재는 더욱 다양해 질 수 있으며 표현방식 또한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에서 요구하는(사회가 보수적이든 빠르게 변혁하든 지에 상관없이) 작품의 소재가 한정되어 있을 경우 작가의 표현양식은 국한되고 다양할 수 없다. 이것은 진정한 작가의식의 발로나 창작이라고 볼 수 없게 된다.
7)현실외면적,도피적 성향의 한국화
물론 어느 사회적 환경하에서든 작가와 작품의 창작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 상황과 관련 없이 작가 개인의 독자적인 작품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보고 환경적 요인에 의한 영향을 받는다고 가정할 때 사회의 분위기나 사건, 상황은 분명 작가의 창작활동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작품에 있어 일차적인 표면적, 내면적 표현의 양식으로 작용하는 소재 역시 그 영향을 받는 것임엔 틀림이 없다.
그리고 작가는 그러한 사회라는 외적 환경에 어느 정도 반응해야하며 표현해야 할 구성원으로서의 예술가로서의 의무를 지닌다고 본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동양화가들 특히 근, 현대를 거치면서 화단의 주요한 위치와 역할을 담당해온 그들에게서 그러한 사회적 역할의 기능을 많이 볼 수는 없었다. 조금은 보수적이고 도피적이며 사회 순응적인 부분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며 현재 한국화의 위기에 대한 담론을 되새겨 본다.
3.결론
한 사회에서 구상이 주가 되느냐, 비구상(추상)회화가 주가 되느냐는 그 사회의 열리고 닫힘의 정도와 절대적인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 소재와 표현방식의 다양성만이 그 사회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을 말해줄 수 있다. 구상, 비구상 관계 또한 시대적 분위기와 일맥상통하는 면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설명적이고 지시적이 사실주의 회화가 주류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상회화가 중심이 된다고 해서 그 사회의 소통구조가 단일화되어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단 그 구상회화의 소재로서 사용되는 종류와 성격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변혁과 혼란의 시기에 접어들수록 구성원들의 자아 의식 내지 가치관 또한 혼란을 겪게 되고 구성원으로서의 작가 또한 그러한 변화에 민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자신의 작품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회변혁의 시기일수록 추상적 표현, 그리고 작가 내적인 표현형식의 다양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도 유의해야 할 점은 무조건 추상적 표현이라고 해서 자유로운 표현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표현 방식은 유입되거나 생겨나는 사조에 의한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이때 추상적 표현방식속에 존재하는 소재가 과연 어떠한 목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사회를 표현하고 작가의 의지를 얼마만큼 표현할 수 있는가, 그리고 소재 선택의 과정에서 얼마나 자율적인 선택을 내렸는가가 더 중요하다.
사회가 크게 변화하지 않은 채 기존의 체제를 유지해나갈 때 혹은 유지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독재와 같은 외적 조건들이 있을 때 회화의 소재는 어떻게 나타날까. 우선은 강력한 억압적 구조에 의해 의도되어진 소재만을 그려낼 수도 있고 그러한 환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일련의 반항적 요소를 지닌 소재가 채택되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간혹 그러한 상황 자체에 대한 체념과 안주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의 60,7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회화가 과연 사회, 정치적 상황에 대한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으로 인정받아야 할지 체념과 안주의 형식으로 간주되어야 할 지는 좀 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사회가 빠르게 변화한다고 해서 작품의 소재가 함께 빠르게 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예술이라는 것이 그만큼 사회와의 관련성에 있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는지 보인다면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는 지도 중요하게 짚어보아야 할 부분이다. 물론 민중미술과 같은 목적성 짙은 회화의 경우는 사회변혁의 속도와 거의 동일한 발맞춤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으로 순수회화라고 불리는 회화들은 어떠한 과정과 어느 정도의 속도로 사회 속에 존재하는가.
사회는 늘 미술작품에 다양한 소재를 제공하고 사회의 움직임에 적합한 회화소재가 채택되어지길 바란다. 하지만 그러한 회화소재와 사회의 관련성은 우선 사회와 예술과의 관계에 관한 관계정립 이후에 논해져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서는 사회와 예술의 관계를 사회 속에 존재하는 예술로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고 시작하였기 때문에 사회내에서의 예술의 역할까지도 짚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가로서의 작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작가 개인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요구하는(사회가 보수적이든 빠르게 변혁하든 지에 상관없이) 작품의 소재가 한정되어 있을 경우 작가의 표현양식은 국한되고 다양할 수 없다. 이것은 진정한 작가의식의 발로나 창작을 불가피하게 막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연구를 통해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바로 우리의 근, 현대를 살아온 한국화 작가들의 능동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물론 작가가 사회와 관련 없이 내적 창작에만 몰두 할 수 도 있다. 하지만 조사에서 나타난 현상들은 분명 시대적 분위기와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회화의 소재와 표현양식이 분명 변화를 겪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 안에는 분명 선택자로서의 작가가 존재했다.
하지만 근현대 한국미술사에서 서양화단이나 다른 장르의 작가들에 비해 한국화 작가들의 모습은 다소 보수적이고 도피적이며 사회 순응적인 모습을 띄고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부분이 현재 한국화의 위기로 일컬어지는 담론의 큰 원인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작품창작에 있어서 외재적 요소들의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고 결과물을 내 놓을 지는 작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로 소재가 정해지고 그 소재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대의 한국화 작가들이 좀 더 능동적이고 발전적인 선택을 통해 한국화의 위기를 벗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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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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