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과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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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독교 세계관과 음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책은 현대 세계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 본질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목표는 이와 관련된 문제들 중 일부를 조사하고 몇몇 해답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음악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학적인 문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수수방관하거나, 아니면 우리와 좋고 싫음과 우리가 선호하는 전통을 북돋우고 비평은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만 남겨 놓는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음악의 영역에 대해 더욱 객관적이고 심도 있는 사고를 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음악에는 여러 이해관계가 읽혀 있고, 그 문제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그냥 간과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십 년 간 복음주의 진영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예술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일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는 성경을 그들의 종국적인 권위로 인정하는 신자들에게는 당연하고 긍정적인 과정이다. 선경은 일반적인 문화와 특수한 예술에 고나해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최근까지 만해도, 예술에 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견지하고 추구하는 복음주의 신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부분적으로는 ꡐ세상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부분적으로 딱딱한 학문이 의사 일정의 맨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예술은 무시되거나 또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 되었다.
그러나, 비록 불완전하지만 서서히 이러한 부족분(?)이 채워지고 있다. 개별 예술가, 극작가, 음악가들은 당황하지 않고 그들의 기독교적 확신을 전문가로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예술가 집단, 축전(?), 잡지와 강좌가 신앙과 예술을 통합하려는 목표를 각고 만들어지고 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미학책이 몇 권 출판되어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실로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는 음악이라는 특수한 영역에 관한 책은 거의 없다. 서양의 찬송가에 관한 소수의 역사책, 교회 음악가를 위한 안내서 또는 ꡐ위대한ꡑ 작곡가들의 작품 선집을 제외하고는 음악적 미학의 문제에 관한 것은 매우 적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한 실제적 답변이 필요하다. 확고한 사고가조내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명령하는 깊이 그리고 풍부함과 맞지 않는 사고와 전통을 제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음악적 양기뿐만 아니라, 시장 경제, 이미지, 서정성 그리고 그 밖의 예술적 생산의 일부를 이루는 것은 윤리적 사고보다는 실용적인 규준에 의해 결정되며 일상적인 용법을 따른다. 게다가 ꡐ주된 노선ꡑ(party line)에 도전하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드는 타성(惰性)이 형성될 것이다. 서구에서 동양으로, 그리고 북부에서 남부로 훨씬 더 많은 것이 전달됨에 따라, 전통적인 복음주의는 그것이 형성된 문화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문화로 수출될 것이다. 그리고 복음주의가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해 그러한 전통들에 천천히 동화되거나 아니면 그것에 반항하는 사회들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의 문화에 끼친 영향 때문만이 아니라 더욱 넓은 구도(?) 때문에 음악 미학의 문제에서 그 책임이 상당히 크다.
성경적 관점에서 음악을 사고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중요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순한 사회적인 책임감 이상의 더 깊은 일련의 고찰들의 개입된다, 이 책에서 논하게 되겠지만 음악은 이간 본성에 있는 근본적인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실용적이거나(practical) 기능적인 것이 아니다. 음악은 우리의 피조물됨 즉 세계, 다른 인간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기본적인 것이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책임감을 엄어서서 이제는 삶의 본질에서 중대한 것이다. 음악은 어떤 사치품, 한가한 시간을 위한 쾌락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삶의 의미 있는 영역이며, 그것이 없으면 우리가 의도하는 것으로부터 훨씬 더 멀어질 문화적 실체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독자로부터 전문적인 독자에게 이르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제1장은 음악 세계에 관한 간단한 입문서이다. 그 목표는 독자에게 음악이 우리 세계 곳곳에 침투하는 방식과 우리의 삶의 영향을 끼치는 일정한 방식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음악적 경험외 다양성과 풍부함은 음악에 대한 즐거움의 원인이 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다 유용한 것은 아니다. 심각한 문제들이 제기된다. 즉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을 갖고 세속적인 세상의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떤 양식이 적합한가? 로큰롤은 조작이지 않은가? 음악을 만드는 경우 과학 기술(technology)의 사용에서는 어떤 제한이 있는가? 제2장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위해 그 기초를 확립하려고 한다. 우리는 음악과 예술에 대해 말하고 있는 수많은 성경 구절들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가 그 가르침을 발견하기 위하여 성경에 접근하는 방식은 대단히 중요하다. 선경은 음악적 실제를 위항 교본이 아니다. 예술에 ꡐ관한ꡑ 성경 구절을 모음으로써 그 메시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를 인도해 줄 것은 그보다 성경의 신학이다.
마지막 장은 훨씬 실제적인 조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음악 형식과 음악적 실제에 대한 특별한 문제들을 살펴보게 돌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로큰롤이나 교회 음악,그리고 세속 음악을 하는 그리스도인 등 더욱 논쟁적인 몇몇 주제들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우리는 또한 현대 음악의 문제가 취급될 수 있는 몇몇 방식들을 조사할 것이다. 세계의 음악(music), 즉 서구 음악뿐만 아니라 비서구 음악을 고려하는 것은 나의 주된 관심 중 하나이다.

본문내용

이 장에서 제시된 의사소통, 육화와 정통성이라는 이상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미를 위한 그같은 표준이 응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전체에서 보이는 문화와 양식의 거대한 다양성이, 어떤 악곡이 선하고 어떤 악곡이 그렇지 못한지를 공정하게 평가해 줄 수 있는 표준들의 법전을 제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연관된 문제를 인위적인 대조표가 포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이다.
이와 연관된 것은 어떤 장르가 다른 장르보다 나은가 하는 문제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베토벤은 밥 딜러보다 낫지 않은가? 물론 이에 대한 첫 번째 답은 명백하다. 이 두 가지 음악 문화는 상이하게 달라서 그들을 비교하는 것은 무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두 다른 두 대답이 첫 번째 답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먼저 베토벤과 딜러 사이의 문화적 거리로 인해 어떤 표준도 전혀 부적합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딜러의 어떤 노래들은 예언자적인 노래라는 매체에 적절한 표준들로 판단할 때 다른 노래들보다 덜 성공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그의 기독교적 노래 중의 일부는(결코 전부가 아니다) 그의 직선적인 반항의 음악보다 예술로서 더 빈약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는 베토벤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작품 모두가 예를 들면, 3번 교향곡에서 볼 수 있는 통합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는 - 이는 세 번째 답인데- 훨씬 더 어려운 문제이다. 이는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제기되어야만 한다. 어느 정도 기독교적인 영향을 끼쳤던 사회에 있는 기독교적 문화에 뿌리박은 음악은, 다소간에 다른 종류의 음악보다 풍부하고 훨씬 더 표현적이며 한마디로 더욱 아름답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들릴 수 있는 이런 확언은 수천 가지의 한정어와 느낌 차이(muance)를 필요로 한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이제 막 제시되었다. 즉 딜러의 '기독교적' 노래는 베토벤의 세속적 음악보다 빈약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훨신 더 근본적이며 미묘한 것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동일할 때(그런데 보통은 모든 것이 동일하지 않다), 기독교적인 문화에 만들어진 예술은 다른 예술에서 볼 수 없는 미적 차원을 가진다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기독교 작가인 C.S. 루이스(C.S. Lewis)가 그의 소설을 결코 메시지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마 놀랄 것이다. 그는 어떤 종류의 양식이나 장르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마음을 많이 빼앗기지 않았다. 1965년에 유저(遺著)로 출판된, 킹슬리 아미스(Kingsley Amis)와 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회견에서 C.S. 루이스는 그의 저술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저작 내용과 주제 사이의 관계와 저작들이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두 번째 소설 Perelandra의 출발점은 떠다니는 섬에 대한 나의 정신적인 영상이다. 어떤 의미에서 내 나머지 저작 전체는 떠다니는 섬이 존재하는 세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이루어 져 있다. 그러고 나서 물론 돌이킨 타락에 관한 이야기도 전개된다. 이것은, 당신도 알다 시피, 이 놀라운 나라에 당신의 사람들을 도달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일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루이스가 강조하는 것은 메시지로 시작해서 그 다음에 그것을 옮길 방법을 찾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마치 교회에서 시편 낭송을 위한 창가를 작고하기 위해서 꼭 메시지로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이 어떤 경우에는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먼저 '말해야 할 무엇을 갖고' 그 후에 적당한 매체를 찾는 것은 선전 예술로 연결된다. 그것은 또한 예술이란 곧 세계에 대한 미적 통치로 수반하는 인간적이며 문화적인 반응이란 것을 잊어버리게 한다. 훨신 더 직접적으로 말하도록 부름을 받은 설교자들이나 과학자들 그리고 도덕가들에게 메시지를 순수히 전하는 일을 맡기는 거이 가장 좋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가장 훌륭한 작가들은 그들의 혈관 속에 잉크가 아니라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명은 이런 성경적인 원칙으로 무장해서 우리 세계로 돌아가 인간이 살기에 더욱 적합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값을 주고 산 바 되었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주님과 이루는 교제가 우리로 하여금 노래하도록 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이런 소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은 이 세계의 풍경을 눈물과 슬픔의 풍경으로부터 위대하고 아름다움의 풍경으로 바꾸기 위해 이미 일하고 계신다: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唱和)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땅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고귀한 소명이다. 그것은 유토피아적인 계획도 아니고 진보를 위한 또 하나의 사회적 강령도 아니다. 대신에 우리는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이의덕을 여러분이 선포하게'(벧전 2:9) 하려고 부름을 받았다. 이 덕(excellencies) 에는 고통과 죽음에도 기꺼이 자신을 복종케 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영광이 포함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당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사 53:2).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아름다움 자체였으며 높이 들리어 올리우셨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신다.(요12:32)
이것이 왜 아름다움의 경험-시작 예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지간에-이 궁극적인 실제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를 향한 그의 계획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가 하는 이유이다:'이제 나는 예배에서나 사랑에서나 윤리적 행동이나 지식에서처럼 내 자신을 초월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초월할 때 나 이상의 자신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노래하셨기 때문에 그에게 노래한다(습3:17). 하나님의 노래는 새벽별의 음악보다 얼마나 더 고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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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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