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및 작중인물의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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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의 정랑.참의를 거쳐 이조참판에 승진,1625년(인조3)부제학이 되어 대동법의 시행이 재론되자 그 선행조건으로 호패법의 실시를 주장,호패청 당상이 되어 이를 관장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왕을 강화로 호종,강화를 주장하고,다음해 경기도 관찰사로 전임,그 후 병조참판.우참찬.호조판서.판의금부사.병조판서를 역임. 1636년 한성부 판윤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홍익한 등의 척화론에 대해 명분보다 현실적인 정세에 적응키 위해 강화를 해야 한다고 주화론을 주장,수차에 걸쳐 청진에 왕래하여 강화의 조건을 타진했고,항복이 결정되자 항서를 초안했다. 1637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어 사은사로 심양에 가서 포로의 석방과 척화신의 귀환을 교섭,다음해 귀국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1645년 완성부원군에 진봉되고 어영청 도제조를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소설 속에서 합리적이며 책임감 있는 성격이 강하다.
(3)김상헌: 출생과 사망은 1570 ~ 1652년. 조선 중기 문신.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의 관직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저서에 《야인담록》 등이 있다. 본관 안동. 자 숙도(叔度). 호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어려서 윤근수(尹根壽) 등에게 수학하였고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고 이어 예조좌랑·시강원사서(司書)·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01년 제주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와 수령들의 근무상황을 점검하라는 임무를 띠고 어사로 파견되었다. 선조 말년에는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모함할 때 같이 연루되어 고산찰방(高山察訪)·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의 외직으로 전보되었다.
원래는 절개의 화신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는 대책 없는 원칙주의자로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김상헌의 진정성은 높이 평가되지만 절개를 지킨 강직한 선비로서의 이미지는 퇴색되어 보인다.
(4)김류: 출생과 사망은 1571 ~ 1648년. 본관 순천. 자 관옥(冠玉). 호 북저(北渚). 시호 문충(文忠). 임진왜란 당시 신립(申砬) 휘하에서 종군하다가 탄금대싸움에서 죽은 여물(汝)의 아들. 1596년(선조 2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광해군 때는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의 북인들과 관계가 좋지 않아, 이렇다 할 중앙관직을 맡지 못한 채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하였다. 광해군 말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난 이후로는 조정에서의 출세보다 시사에 통분을 느껴, 1620년(광해군 12)경부터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도모하였다.
(5)서날쇠: 실제 인물이 아닌 가상인물로 매우 현실적이며 우직한 성격을 보여준다.
(6)나루: '인조가 그 아이를 통해 웃음과 희망을 느낀다' 라는 말을 통해 나루는 인조의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7)홍타이지: 출생과 사망은 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 애신각라 황태극은 효자고황후 엽혁나랍씨 소생으로, 태조 천명고황제 노이합적의 여덟번째 아들이었다. 특히, 복선(伏善, 다이샹) 등과 함께 사대왕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여 베일레[貝勒(패륵)]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천명 11년(1626년)에 태조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태조 사후 칸의 보위에 올랐고, 이듬해 천총이라는 연호를 개원하였다. 즉위 당시 남명(南明)과 교전상태에 있는 국내외적으로 다소 어려웠으나 만주족과 한족과의 관계 등 국내의 융화를 꾀한 후 외정에 나섰다. 천총 9년(1635년) 주변의 여러 국가를 침공 및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으며, 내몽골를 평정하여 대원전국 옥새(大元傳國 玉璽)를 손에 넣은 것을 계기로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개국하였고, 연호를 다시 숭덕(崇德)으로 바꿨으며, 1636년 태자 시절 인조반정으로 청나라에 부정적인 정권이 들어섰다는 점을 알고, 아버지의 뜻을 무시하고 12월에 조선을 침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킴으로서 1월 30일부로 전쟁을 끝내고,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중국 본토에도 침입하여, 중원 제패의 꿈을 이루지 못하여 뇌출혈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그리고, 재위기간동안 내삼원(內三院)과 6부(六部), 군사 및 행정제도인 팔기군체제를 확립하여 대청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사후 선양[瀋陽]의 북릉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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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93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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