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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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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식민지와 식민지자본주의
1. 식민지적 본원적 축적
2. 1920년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이식/발전과 30년대 이래 독점/중화학공업의 발전

Ⅱ. 식민지와 식민지민족주의

Ⅲ. 식민지와 식민지지배(식민지배)

Ⅳ. 식민지와 식민지일본인

Ⅴ. 식민지와 식민지종교정책

Ⅵ. 식민지와 식민지능금정책
1. 조선총독부의 능금정책
2. 지방정부의 능금정책

참고문헌

본문내용

일을 도모하면서 아울러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단지 장려만으로는 그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주요 품목의 동업자들을 한데 묶어서 단체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적당한 지도와 감독을 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이처럼 마련한 것이었다.
결국 이 법령에 따라 동업조합을 설치할 수 있는 산업의 종류는 먼저 미, 대두, 소, 돼지, 면화, 누에고치, 과실, 직물, 종이, 양조 또는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만 한정되었다. 그 후에도 그 종류는 계속 증가하여 1919년 11월에는 일반가축, 우피 및 모피제품, 잠종, 뽕나무 묘목 등이 여기에 추가되었다. 여하튼 이 법령에 따라 ‘경상북도과물동업조합’이 우타하라(歌原恒)를 조합장으로 하여 그 설립을 발기하고, 1917년 10월 22일자로 인가(商 제510호)를 받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하였다.
한편, 식민지 초기 한국 농업에는 신흥산업인 과수업이 등장하여 그 우량품종이 널리 보급되어 갔었다. 그와 함께 모든 종류의 농업 생산이 식민모국의 입장에서 정비되고, 그에 따른 판매 조직이 세워지던 시기였다. 그에 따라 종래와 달리 모든 농산물의 상품성이 향상되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지금까지 매우 무관심하였던 농작물 병충해가 크게 문제를 야기하였던 시대였다. 조선총독부가 ‘과수급앵수수이입취체규칙(1912년 12월)’과 ‘해충구제예방규칙(1913년 1월)’을 서둘러 제정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당시 한국 과수의 재배 확대는 전적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묘목, 접수(接穗), 침목(砧木) 등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는 해마다 심각한 병충해 발생을 야기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각 세관은 수이입된 과수나 벚나무의 검사와 소독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던 것이었다.
이처럼 식민지 초기 조선총독부의 “농정방침”에는 과수재배의 장려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특히 그들은 ‘동업조합의 설치’를 통하여 그들의 목적으로 달성하려 하였다. 이처럼 1910년대는 식민정책의 초기로써 능금을 주축으로 한 새로운 과수산업을 등장시켜 그 우량품종을 보급하고, 그것과 함께 모든 농업 생산물을 식민모국의 입장에서 정비하여 판매의 조직을 세워가던 때였다. 특히 그들은 과일나무의 병충해 방제를 위하여 수입 과일나무와 벚나무의 검사소독을 위한 총독부령과 해충구제예방규칙을 제정하여 병충해 방제에 매진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하얼빈 및 홍콩 방면으로 능금판로를 확장해 갔으며, 아울러 조선산 능금 생과에 대한 이입세 감소를 성취하고 철도운송을 개시하였다.
2. 지방정부의 능금정책
식민지 초기 지방정부의 능금정책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례는 경상북도이다. 이곳의 능금생산은 1905년경에 이주해온 일본인 농업이민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이들은 1907년부터 종래 문기(文記)로 주로 매매되던 토지소유권이 동장과 군수의 증명만으로 간단히 이전되게 되자, 급속히 그 수가 늘어났었다.
경북의 능금생산이 처음으로 난관에 봉착한 것은 새로운 능금 병해충인 면충의 발생 때문이었다. 1911년에 최초로 칠곡군 왜관지역에서 발생하였던 면충은 1913년에 이르러 대구에서도 발생하였다. 비록 청산가스 훈증 및 벌채 등의 방법으로 구제를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더욱 확산되었기 때문에, 이곳의 과수업자들은 국고와 지방비의 보조까지 받아 석유를 공동구입하고 석유 유제를 바르는 새로운 방제법이 시행하였다. 그럼에도 1915년에는 면충이 창궐하여 종래와 같은 ‘굴취(堀取) 소각법’만으로는 구제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자, 경상북도는 가을에 도종묘장(道種苗場) 직원을 파견하여 대구와 왜관의 두 과수조합과 함께 도내 능금원의 피해상황을 답사하고 방제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때 경상북도 당국은 국비 3천원, 지방비 620원을 보조하여 ‘일제구제(一齊救濟)’를 단행하였는데, 피해를 입은 능금나무의 수는 57,166본이었고 구제비 및 손해 견적액은 9,517원 72전에 달하였다.
역시 1916년에도 경상북도는 ‘능금의 면충구제에 관한 도령(道令)’을 발포하여, 면충 및 개곡충의 구제에 전력을 다하였는데, 당시의 주요한 피해처치법은 벌채소각, 석회수 침지(浸漬), 채종유 유제, 다루합제의 도포, 석유유제, 제충국 가용석유유제, 석회소황합제의 살포 등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1917년경부터 심식충이 발생하였고 1921년 12월에는 그 창궐이 극에 달하였다. 그 외에도 능금의 축과병, 갈반병, 탄저병 등이 발생하여 경상북도는 과수재배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여러 차례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이러한 시련을 겪으면서 경상북도는 지역능금의 발달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한 동업조합의 설립이 필수적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7년 10월에 왜관과 대구의 두 과수조합을 폐지하고 새로이 ‘경상북도과물동업조합’을 설치하였다. 이 시기 경북능금의 재배지는 낙동강, 금호강 연안을 중심으로 한 매우 광대한 지역이어서 하늘이 내려준 과수 원예지로 평가되었다. 당시 경북능금의 주요품종은 홍옥, 국광, 축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경북능금은 일본의 오사카에서 고베 및 간몬(關門) 지방을 중심으로 교토, 나고야, 규슈 및 동경으로 수출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주로 서울과 부산지방에 팔려나갔다.
이처럼 경상북도와 같은 지방정부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능금정책을 통하여 지역능금을 개발하여 전국에서 유명한 산지로 발전시켰다. 특히 1910년대의 능금정책은 지역능금의 발달을 위해 우수한 동업조합을 설립하고, 능금 병해충의 방제와 구제에 활동을 집중하였다.
참고문헌
기유정(2011) :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과 지역 의식의 정치효과, 한국정치학회
김동명(2003) : 한국 병합과 식민지 지배, 일본사학회
김승태(2006) :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과 한국 기독교계의 대응 : 1931년~1945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정일(1990) : 식민지초기(1910년-1915년) 농장형 지주제의 실태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임규택(1968) : 식민지민족주의의 기본성격과 방향, 동국대학교
정태헌(2000) : 1910년대 일제의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 구축 과정,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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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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