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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시대, 항일전쟁시대 배경, 항일전쟁시대 지방유생, 정치사, 종교정책]항일전쟁시대의 배경, 항일전쟁시대의 전개, 항일전쟁시대의 지방유생, 항일전쟁시대의 정치사, 항일전쟁시대의 종교정책, 시사점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항일전쟁시대의 배경
1. 전기(前期) 의병
2. 후기 의병

Ⅲ. 항일전쟁시대의 전개

Ⅳ. 항일전쟁시대의 지방유생
1. 의병의 독립군으로의 전환
2.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활동

Ⅴ. 항일전쟁시대의 정치사

Ⅵ. 항일전쟁시대의 종교정책
1. 단군대종교 - 철저탄압, 박멸정책
2. 유교 - 극단적 비방, 철저탄압
3. 동학천도교 - 탄압 및 회유, 이이제이(이간) 정책
4. 개신교 - 탄압 및 무시, 이이제이(이간) 정책

Ⅶ. 결론 및 시사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공격했다. 침략일본은 불교를 들여온 이차돈, 개신교 1호 목사 서경조, 천주교 1호 신부 김대건을 안향에 대한 비방과 같이 하지를 않았다. 아니 김대건 신부는 비방은 커녕 최대한 부각시켰다. 생각하건대 중국에서 외국학자에게 자(子)로 높혀서 성인 취급을 하는 사례가 거의 없고, 우리 민족에서는 유일하게 높혀 불러서 안자(安子)로 추앙받는 거대한 유학자 안향을 일제침략자들은 끝없이 모함하고 헐뜯었으니 그것의 진짜 이유는 유교가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유교를 공격한 핵심적 이유는 유림 세력이 너무도 애국적이고 너무도 훌륭하여 유림이 있으면 그들의 침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는데, 거꾸로 유교를 욕하는 논리만이 오늘날에는 이 땅에 남아있다. 침략일본에 세뇌된 종교침략 논리를 말하는 간교한 흐름은 주로 친일파들이 퍼뜨렸는데, 그것이 오늘날에도 남았으니 기막힌 일이다. 이 나라의 오늘이 친일파들이 주도권을 쥐고서 강한 친일유습에 찌들어 있는 기막힌 사회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요컨대 유교를 욕하는 것은 우리의 독립의지를 꺾고 우리를 무력화시키려는 것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서 역사를 보아야 역사가 제대로 보일 것이다. 일제의 유교 공격은 침략적 종교공격의 전형적인 것이었다.
특히 일제침략자들이 안향을 공격한 핵심적 이유는 첫째로 안향이 양현고(養賢庫)나 섬학전(贍學錢)을 만들어 인재양성의 기금을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고려말 이후 조선시대 인재양성의 기틀을 만든 인물이 안향이기에, 요즘으로 말하면 국립 장학재단 혹은 학술진흥재단을 만들어 학문을 크게 발전시킨 토대를 놓았다는 점에 유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인재를 양성하고 국립대학인 국자감의 재정적 뒷받침을 확실하게 한 것이니 고려말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 우수한 인맥이 나오는 토대를 만든 것이다.
둘째로 안향이 정립한 유교의 학풍은 바로 민족주의 내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정의론(正義論)이 주축이었다고 하겠는데, 일제침략자들은 그것을 예리하게 본 것이다. 안향이 살았던 때의 남송(南宋)의 학풍은 몽골족의 침입에 따른 애국적 정의론의 성향이 높았고, 안향이 살았던 때의 고려말도 몽골족의 침입에 따른 민족주의적 흐름이 강했다. 일제침략자들은 왜 조선 유학자들이 일제에 철저히 항거했는가의 이유를 안향의 유교학풍에서 찾은 것이다.
셋째로 안향의 학문적 수준이 너무 높아서 조선 유학자들의 정신적 기둥이 됨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안향을 공격하면 조선 유학자들의 구심점 공황이 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이 왜 안향의 고향에 세워졌는가? 최초의 서원이 조선시대의 정신적 스승의 고향에 세워 졌음을 뜻한다. 다시 이황의 요청에 의해 그곳에 임금님 친필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만들어 졌음도 중요한 것인데, ‘소수’란 전통을 잇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안향의 드높은 정신을 잇는다는 것이니 ‘소수’정신이 바로 조선 유학자들의 저항의 원천임을 깨닫고 안향을 끝없이 모함하고 헐뜯었던 것이다. 그래야 그들의 침략에 저항하는 핵심세력을 와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 동학천도교 - 탄압 및 회유, 이이제이(이간) 정책
일제는 동학천도교를 일으킨 최제우나 최시형을 철저히 매도함은 물론이고 철저히 탄압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동학천도교에 대해서는 단군대종교나 유교 보다는 탄압의 정도를 강하게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동학천도교는 우리 사회의 최고 지도층이 이끄는 조직이 아니라 민중들의 종교였고, 만주땅에 망명하여 결사항전을 하는 바도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동학천도교는 31만세항쟁 때에 극도로 탄압을 받았고 신도들이 무수한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동학천도교도들은 단군대종교나 유교와 같이 무장투쟁을 한 흐름이 적다 보니, 점차 회유하고 변절시키는 등의 교활한 종교정책을 썼었다. 또한 동학천도교도들이 주로 국내에 많이 잔류해 있었기에 회유하고 변절시킨 친일세력을 통해 애국세력을 꺾고 내분이 일어나게 하면서 자멸되게 하는 전략도 강하게 썼었다.
4. 개신교 - 탄압 및 무시, 이이제이(이간) 정책
개신교는 일제침략자들에게 묘한 정책이 나오게 만들었다. 개신교의 일부는 확실히 항일을 했는데, 또 그렇지 않은 숫자도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교나 단군대종교 신도들 같이 결사항전을 하는 성향도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적절히 달래고 탄압하며 무시하는 복합적 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나타난 기묘한 사례의 하나가 개신교 1호 목사인 서경조인데, 항일애국에 전 가족이 나선 훌륭한 가문이고 존경받을 뛰어난 목사인 서경조의 이름을 아는 우리 민족이 거의 없다. 천주교 1호 신부인 김대건이 사뭇 위대한 영웅인 듯 억지로 높이고 신격화시킨 듯이 받들어지는 사회에서, 정말로 훌륭한 목사님인 서경조는 완전 묵살되고 말았으니 침략자들의 역사서술이 어떠했나를 말하는 기막힌 사례가 되겠다.
그러나 일제는 한편으로 동학천도교같이 일제에 협조하는 변절세력을 만들려는 노력도 집요하게 경주하였다. 그리하여 개신교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변절자가 나오게 만들었다. 또한 변절세력과 애국세력을 교묘히 조종하여 내분과 알력이 유발되게 하는 흐름도 강하게 조장하였다.
Ⅶ. 결론 및 시사점
항일전쟁 시대의 역사는 많은 것이 거꾸로 되어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의 가치판단은 거꾸로 해석해야 옳은 것이 많다. 우리는 흘러간 옛 얘기만 그런 줄로 알고서 식민사관에 의한 오도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결코 흘러간 역사만이 아니다. 오늘의 삶이 곧 바로 잡혀야 할 핵심인 것이 널려 있다.
참고문헌
* 강현사(2004), 항일전쟁시기 신사군 연구 : 통일전선 정책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 김학준(2005),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 문정일(1990), 중국전선에서 싸운 조선의용군의 항일전쟁, 한국역사연구회
* 안천(2001), 항일전쟁 시대 종교항쟁의 종합적 평가, 한국북방학회
* 안천(2010), 항일 전쟁사 왜곡현상과 사회과교육, 한국사회과교육연구학회
* 이건일(1997), 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의 군대정치사업에 관한 연구, 국방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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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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