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개화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부국강병을 시급한 과제로 제기한 것이다.
그는 부국강병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국민을 속박하지 않고 온건하게 다스릴 것, 국법을 고수하여 임의적으로 처리하지 않을 것, 백성들에게 응분의 자유를 보장하여 원기를 기를 것, 각국의 종교를 수용하여 교화의 바탕으로 삼을 것 등을 제시하였다. 그는 백성들의 권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인민은 태어나면서 부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통의(通儀)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스스로의 생명을 보전하며, 자유를 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박영효는 모든 인간은 보편적이며 천부적인 권리를 지니고 태어났다고 전제하고, 이것을 보호해 주는 것이 정부의 직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어린이든 어른이든, 빈천한 사람이든 부귀한 사람이든, 그 신명(身命)은 동일한 것이다. 한 가난한 사람의 낡은 옷이라도 제왕의 영지와 마찬가지로 법으로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심산, 2003, p418.
또한 박영효는 건백서 ‘흥법기 안민국’을 논한 제 2조에서 봉건적 신분차별과 특권계급의 자의(恣意)에 의한 인민권리의 침해를 배제하기 위하여 법 앞에 만민은 평등하다고 하는 근대 법치주의의 확립을 주장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법률은 인민의처신과 결교(結交)의 규범으로서 정리(正理)를 권하고 사악을 금하는 것이다. 그것을 행함에 있어서는 무편무당(無偏無黨)하여 다만 시비곡직의 理를 가려 이를 다스리고 죄가 있으면 귀인(貴人) 일지라도 반드시 벌하고, 사랑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형을 내리며, 죄가 없으면 천인이라 해도 누르지 말고, 미워한다 하더라도 박해하지 말아야 한다. 소아(小兒)라 하고 대인(大人)이라 하고, 빈천이라 하고, 부귀라 하더라도 그 신명은 모두 하나이다. 강재언, 『근대한국 사상사 연구』, 미래사, 1983, p.95.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종교의 자유를 역설한다.
종교는 인민이 의지할 바이며 교화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쇠하면 나라도 쇠하고 종교가 성하면 나라도 성해집니다. 옛날 유교의 성함이 중국을 강성하게 했고, (…) 우리조선도 일찍이 유·불의 교가 성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일에 이르러 유·불이 공히 폐하고 국세도 점차 약해졌습니다. 어찌 한심 탄식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호라, 유교를 다시 성하게 하여 문덕(文德)을 닦으면 이로써 국세 또한 다시 그 성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시운(時運)이 있으니 힘으로써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릇 종교는 백성에게 맡겨 신봉을 자유롭게 하고 정부가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예로부터 종교상의 싸움이 인심을 동요케 하고 나라를 멸하게 하며 인명을 손상케 하는 예가 헤아릴 수 없으니 이를 거울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모든 종교를 교화의 근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단순히 유교를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변법적 개화사상가인 김옥균과 박영효의 사상을 종합해보면, 정치적으로는 입헌군주제, 경제적으로는 산업 근대화, 사회적으로는 신분제철폐, 교육적으로는 시민교육과 실업교육, 자력에 의한 국가방위 등이었다. 그들의 개화사상은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자고 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진보적 사고는 더 이상 유교적 전통의 울타리에 머물지 아니하였고, 일체의 비합리적인 권위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주장인 ‘자주적 근대국가’를 민중으로부터 도출해내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하고 말았다.
3. 개화사상의 의의와 한계
400년 이상 조선사회를 지탱해 오던 성리학이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을 즈음에 개화사상이 출현하였다. 개화사상은 종래의 전근대적인 폐습을 타파하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자유와 풍요를 역사적 진보의 성과를 제시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점에서 위정척사론과는 다른 사상적 가치가 잇다.
특히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변법개혁론자들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이 자취를 감추었고, 문명과 야만의 기준도 바뀌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개인적 자유와 물질적인 풍요였다. 그들은 자유방임적 기조에 입각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제국주의 열강과 승부를 겨루자는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이들은, 당시 ‘문명개화’한 제국 주의 열강이 약소한 조선에 대해 제 방면의 침략적 의도를 점차 심각하게 드러내자, 열강의 세력 균형을 이용한 조선의 중립화론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모든 노력이 무위(無爲)로 그치자, 이들은 기울어가는 국가의 운명을 실력양성으로 돌이키려 하였다. 그들의 실력양성론은 신교육을 실시하여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근대적인 국민의식을 지니도록 계몽해야 한다는 애국계몽운동과, 근대적인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식산흥업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실력양성론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이데올로기로서는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이었고 마침내는 그 운동의 주창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로 흘렀다.
개화사상가들이 세계사의 조류를 통찰하고 부국강병에 의한 자주독립 사상을 지녔던 선구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그들이 여러 가지 전 근대적인 폐단을 직시하고 그것을 근대적으로 개혁하려 했던 점도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모순점 또한 있었다. 개화사상가들은 효과적인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기존의 의리사상을 멀리하고 공리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추구는 결국 갑신정변과 같은 무모한 정변을 시도하게 하였고, 그러한 시도는 김옥균 · 유길준 등에 의해 그 후에도 몇 차례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공리주의에 입각한 개화파의 근대적 개혁사상은 결국 민족개조(民族改造)의 논리로 발전되었고, 이는 일제가 식민통치는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빌미를 제공한 격이 되었다.
※ 참고문헌 ※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심산, 2003.
조현규, 『한국 전통윤리사상의 이해』, 새문사, 2002.
강재언, 『근대한국 사상사 연구』, 미래사, 1983.
김윤경, 『청소년을 위한 한국철학사』, 두리미디어, 2007.
최봉익, 『또 하나의 우리 철학사』, 온누리, 1989.

추천자료

  • 가격2,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3.07.23
  • 저작시기201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6481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