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선전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육정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전쟁,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군, 대한민국임시정부 중국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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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선전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육정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전쟁,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군, 대한민국임시정부 중국지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선전활동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육정책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전쟁
1. 방략 일반
2. 외교방략
3. 군사방략
4. 의열투쟁방략과 독립전쟁준비방략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군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국지원

Ⅸ. 결론

본문내용

동 세력을 지원하는 중국정부의 주요한 근거가 되었고, 이후 한중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방안은 총강요지방법 등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다른 나라보다 먼저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에서 운용한다는 것 등이 주요내용이었다.
장개석은 이 지도방안에 따라 군사위원회 참모총장 하응흠, 국민당 중앙조직부장 주가화, 국민당 중앙비서처 비서장 오철성 3인을 한국문제 주관인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모두 요직에 있던 사람들이었으므로, 별도로 다수의 사무 집행인들이 독립운동(임시정부) 지원 문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의 3인은 경우에 따라 서로 대립하기도 했고,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각기 자기를 통해서만 교섭에 응하라고 하는 등 내부 갈등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에 지장을 준 면도 많았다.
한국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이러한 방침은 1943년 11월에 개최된 카이로 회담에서 일단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 중국의 수뇌들이 회합한 이 회담에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의 독립을 ‘적당한 시기에’실현시키는 것으로 합의되었던 것이다. 물론 ‘적당한 시기’라는 모호한 문구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상당한 의구심과 불안감을 조성했지만, 적어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한국이 독립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대만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회담에서 장개석이 적극 주장하여 한국문제에 관한 구체적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미국측 자료에는 회담 당시 루즈벨트가 중국이 만주와 한국 점령을 포함한 광범위한 야망을 갖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이후 임시정부 내의 분쟁과 미국과의 관계 및 국민당 내부의 책임전담 기구 문제 등으로 1944년 4월 13일 다시 ‘한국문제 처리원칙’을 세웠다. 그 내용중 주목되는 것은 미국과 수시로 상의한다는 항목이었다. 이는 종전에 볼 수 없던 것으로 중대한 태도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독립이 보장되었으나, 미 영 소의 한국문제 인식은 일치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미국의 많은 원조를 받으며 항전체제를 유지하던 중국으로서는 미국의 영향력이나 이해관계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 원칙은 이후 임정의 승인문제와 전후 한국의 독립문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중국이 임정을 타국보다 먼저 승인하겠다고 누차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은 임정 자체의 문제도 있었지만, 중국 당국 자체의 통제 및 이용목적, 미국의 반대 등이 직접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중국은 위의 원칙에서 전담 책임기구를 지정토록 했지만, 실제로 한국문제 관련기관은 통일되지 못했고, 그 지원도 여러 계열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일정한 지원방안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는 이전 단계에 비하면 진전된 것이었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체계적 지원이 어려웠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중국의 각 기관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고의적으로 각 당파와 연관을 맺어 임시정부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의 파쟁을 심화시키기까지 했다.
국민정부의 지원은 주로 임시정부와 광복군 계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국의 지원은 그들의 국내외 사정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적지 않은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돕는 중국공산당을 의식하여 반공을 구실로 한인들에게 공공연히 三民主義를 강요 또는 권유하기도 했다. 또 “삼민주의의 독립국가를 건립케 부조하는 것이 최후의 목적이다.” 라고 하여 해방 후의 독립국가 건설 시기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 안에서도 이러한 지원방식에 대해 비판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Ⅸ. 결론
일제하 독립운동 방략으로 식민통치 시설이나 기관의 파괴 또는 일본인 관리 및 일제의 밀정, 주구배 등에 대한 처단활동을 ‘의열투쟁’이라고 한다. 이 같은 방략은 식민지 권력의 폭압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며, 소수의 인적물적 희생을 통해 일제 식민통치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물론 시기에 따라 많은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적어도 임정 초기와 1930년대 초반 암살폭파 등 의열투쟁은 일제 식민지배에 타격을 가하고, 임정이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임시정부의 의열투쟁은 지금까지 그 파급효과가 지대했던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에만 연구가 집중되어 있었고, 기타 임정의 주요인사와 주변 외곽단체가 행한 의열투쟁 및 친일파 처단 활동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우선 임정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되지 못한 데 연유하지만, 무엇보다도 임정이 행한 암살폭파테러 활동을 소수인의 폭력활동이나 암살 테러리즘으로, 많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단순한 독립투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보인다.
즉 1930년대 들어 조직적 대중운동과 무장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의열투쟁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임정은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비판과 그 무용성을 지적하는 소리도 적지 않았다. 이런 부정적인 견해는 임정이 전체 독립운동 역량의 결집과 통솔에 성공하지 못한 한계 때문에 지적되는 부분이지, 결코 의열투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실질적으로 임정이 행한 의열투쟁은 일제 식민지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으며, 식민지 권력에 기생하는 친일세력에게 위협을 주었다. 또한 임정의 의열투쟁은 국내외 독립운동이 침체되었던 시기에 민족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임정이 주재한 중국 영토안에서 독립운동을 가능케 한 여건을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참고문헌
- 권영건(1992),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삼균주의, 삼균학회
- 오세종(199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가건설론, 계명대학교
- 윤대원(2002),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남북한의 역사인식, 현대사회연구소
- 윤대원(2004), 좌우연합을 지향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일을 여는 역사
- 윤대원(2002),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건과 관내 민족전선통일운동, 역사학연구소
- 이봉원(2010), 대한민국 임시정부 바로알기, 정인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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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13.07.2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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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65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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