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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정희정부(박정희정권, 제3공화국) 리더십, 박정희정부(박정희정권, 제3공화국) 총력전체제, 유신헌법, 박정희정부(박정희정권, 제3공화국) 핵개발, 재건국민운동, 박정희정부(박정희정권, 제3공화국) 교육정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박정희정부(박정희정권, 제3공화국)의 리더십(리더쉽)
1. 경제정책
1) 투자재원의 조달
2) 수출주도의 대외 지향적 발전전략
3)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 위주로 구조의 전환
2. 외교정책
3. 통일정책
4. 교육정책

Ⅲ. 박정희정부(박정희정권, 제3공화국)의 경제성장

Ⅳ. 박정희정부(박정희정권, 제3공화국)의 총력전체제

Ⅴ. 박정희정부(박정희정권, 제3공화국)의 유신헌법

Ⅵ. 박정희정부(박정희정권, 제3공화국)의 핵개발

Ⅶ. 박정희정부(박정희정권, 제3공화국)의 재건국민운동
1. 신생활운동
2. 기독교 농촌운동과 민족주의
3. ‘국민사상운동’

Ⅷ. 박정희정부(박정희정권, 제3공화국)의 교육정책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않았다. 김재규는 그런 그를 대통령에게 비서실장으로 천거했던 것이다.
김계원이 1979년 11월10일에 합수부에서 쓴 제3차 진술서는 차실장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나는 비서실장으로 부임한 후 차지철의 사무실로 가서 인사를 했는데 이에 대하여 답례인사도 오지도 않았습니다. 한번도 본인의 사무실로 찾아온 적이 없었습니다. 차실장은 각하께 보고하러 본관에 와서 1층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도 내가 있는 2층 사무실로 올라오면 될 것을 꼭 1층 대기실로 나를 불러내려 용건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8월경 일본의 후쿠다 전 수상이 방한하여 각하를 모시고 백두진 국회의장, 차지철 경호실장,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뉴관악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나서 샤워장에 들어갔습니다.
백 의장이 맨 먼저 샤워장에 들어갔는데 빨리 나오지 않자 차실장은 샤워장 문을 두드리면서 \"빨리 나와요 빨리. 뭘 하는 거요\"라고 하면서 \"이 늙은이가 무얼 우물우물 하는가.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독촉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연장자에 대한 태도가 무례할 뿐만 아니라 항상 각하를 경호한다는 입장을 내세워서 자리나 차량운행 순서에서 자기가 먼저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각하를 모시고 정부종합청사에 갈 때 각하, 총리, 관계장관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차실장은 자리가 좁다는 이유를 대면서 본인보고는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라고 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차지철은 간혹 각하가 출근하기 전에 대통령 집무실에 와서 기다리다가 먼저 들어가 결재를 받고 나오는 바람에 내가 상당히 기다렸다가 결재를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본인이나 장관들이 결재를 받으러 기다리고 있는데 차실장이 각하 집무실 입구 경호원에게 지시하여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 뒤 자기가 와서 먼저 결재를 받는 바람에 장관들이 차 실장이 결재를 받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차지철은 경호실 정보처로 하여금 정치 및 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각하에게 보고하는데 어떤 사태가 야기되었을 때는 정보부장이 보고차 오기 전에 먼저 보고하여 정보부장이 뒤늦은 보고를 하도록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차지철은 연장자인 본인이나 장관 국회의장 군 선배에게도 님자를 붙이는 법이 없고 오만불손하였습니다. 각하가 방문하는 호텔이나 골프장의 사장들이 각하를 영접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인사하러 나오면 차실장은 들어가라고 제지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자기 업무도 아닌 정치공작에까지 간여하고 육군참모총장 이세호대장을 주1-2회 정도 자신의 사무실로 부르는가 하면 군내의 주요지휘관들과 장성들을 불러다가 돈도 주고 식사도 같이 하고 하는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치열 법무장관이 군인들과 접촉하는 차 실장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의 핵심에서는 항상 최고 권력자의 귀와 눈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다른 요인보다도 먼저 정보를 올려서 그 권력자의 선입견을 차지하는 것이 이런 권력 게임의 요령이다. 차지철 실장은 권력자의 그림자라는 위치를 이런 게임에 활용하고 있었으니 항상 비서실장과 정보부장은 한 발 뒤처지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가부장적 예의범절에 익숙하여 서열을 무시하는 행동을 미워하도록 교육받았다. 특히 군대사회에서는 이 서열의식이 엄청 강하고 예민하다.
그런데 육군대위 출신인 차지철은 육군대장 출신의 비서실장과 육군중장출신의 정보부장, 그것도 나이가 훨씬 많은 두 사람을 마치 하급자 다루듯이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는 정의감이 있고 울컥하는 성격인 김재규가 입버릇처럼 했다는 \"저 자식을 해치우겠습니다\"라고 한 말은 그의 가슴속에서 쌓여가고 있었던 증오심의 온도상승을 뜻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받는 모욕과 그의 월권에 대해서 대통령과 담판을 한다든지 정보부의 막강한 정보수집능력을 이용하여 그를 견제한다든지 하는 식의 대응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만한 논리와 배짱이 없는 대신에 속으로는 울분만 소리 없이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고향 후배이자 육사동기생이고 자신의 비호 아래에서 커온 김재규가 만만해서 그랬는지 여러 사람들 앞에서 김재규의 무능을 나무라곤 했다. 이를 본 대통령측근들은 김재규보다 차지철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왜 박정희가 차지철의 월권적 행동과 오만불손한 언동을 방치하고 부추기기까지 했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육영수 여사가 죽은 후 일어난 그의 인간적 변모에서 해답을 찾으려한다. 권력을 관리하는 자세가 옛날처럼 엄정하거나 날카롭지가 않고 인간적이고 무디어졌다는 것이다. 아내라는 정신적 안식처이자 견제장치가 사라지니 박정희는 허무적, 감상적으로 변하고 권력의 정상이 겪어야 하는 고독에다가 홀아비로서의 외로움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는 인정과 비정을 잘 조화시켜 권력을 잘 관리해온 사람이었지만 말년에는 점차 긴장감을 잃고 있었다. 비서실장 자리를 제의받았을 때 김계원이 고사하니까 박정희는 \"실장 일을 안해도 돼. 나 하고 말동무만 하면 돼\"라고 했을 정도였다.
차지철의 오만방자, 김계원의 조정력 부족에 덧붙여서 김재규는 간질환으로 환자와 다름없는 상태에 있었다. 김재규는 오후에는 궁정동에서 몇 시간씩 취침을 해야 건강이 유지될 정도였다. 심할 때는 이동복을 특보로 임명하여 부장이 읽고 결재해야 할 업무를 대행시키기도 했다. 1979년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민주화세력의 정치적 도전은 정보부장의 업무를 과중시켰지만 김재규는 이런 난세를 헤치고 갈 만한 머리와 건강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참고문헌
노선희, 박정희 군사정부의 국제적 비교연구, 동국대학교, 2011
박태균, 박정희 정부 시기를 통해 본 발전국가 담론에 대한 비판적 시론, 한국역사연구회, 2009
하태수, 박정희 정권 출범 시기의 정부조직법 개정 분석, 서울행정학회, 2010
한승연, 정부혁신의 이념과 정책간의 연계 : 박정희정부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정부학연구소, 2007
한승연, 정부혁신의 사상적 기반 연구 : 박정희정부, 한국행정학회, 2006
한동환, 박정희정부의 정치체계에 관한 연구, 창원대학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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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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