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수 있다. 나는 단순히 패러다임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내 삶에 우리의 삶에 실질적으로 어떻게 적용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해보려고 한다.
<獨氣學說>에서 최한기의 패러다임 즉 그의 동시대의 패러다임과 완전히 단절 되었다고 보이는 디스코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최한기의 저술 행위가 당시대와 다른 패러다임으로 구축되고 있음을 제시한 뒤 그것은 곧 ‘창조자의 공포’라고 말하고 있다.) 나의 이 “공포”라는 언어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곧 이러한 저술행위가 그 당시 얼마나 이단적 행위일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인식과 또 이러한 방법론의 전환이 단순히 사유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디스코스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것, 즉 근원적인 언어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요청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산의 언어와 혜강의 언어가 완전히 단절적인 두 개의 다른 언어가 아닌 이상, 즉 다산과 혜강이 마주앉아 백날을 담론한들 서로 얘기가 통하지 않는 단절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 그 전환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환은 놀랍게도 성공하고 있다고 나는 단언한다. <獨氣學說> 50p.
- 혜강의 논저는 앞서 말했듯이 고전주해가 아닌 자신의 연역적 테마의 전개라는 것을 말했다. 혜강은 기본적으로 시스템 빌더(system-builder)였으며 따라서 그의 저술행위는 체계적인 시스템 빌딩(system-building)이었다. 그럼 이러한 시스템 빌딩이 이미 古典경학을 일탈한 것이라면 분명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모델 즉 경학 밖의 레퍼런스의 프레임
<獨氣學說>에서 최한기의 패러다임 즉 그의 동시대의 패러다임과 완전히 단절 되었다고 보이는 디스코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최한기의 저술 행위가 당시대와 다른 패러다임으로 구축되고 있음을 제시한 뒤 그것은 곧 ‘창조자의 공포’라고 말하고 있다.) 나의 이 “공포”라는 언어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곧 이러한 저술행위가 그 당시 얼마나 이단적 행위일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인식과 또 이러한 방법론의 전환이 단순히 사유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디스코스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것, 즉 근원적인 언어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요청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산의 언어와 혜강의 언어가 완전히 단절적인 두 개의 다른 언어가 아닌 이상, 즉 다산과 혜강이 마주앉아 백날을 담론한들 서로 얘기가 통하지 않는 단절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 그 전환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환은 놀랍게도 성공하고 있다고 나는 단언한다. <獨氣學說> 50p.
- 혜강의 논저는 앞서 말했듯이 고전주해가 아닌 자신의 연역적 테마의 전개라는 것을 말했다. 혜강은 기본적으로 시스템 빌더(system-builder)였으며 따라서 그의 저술행위는 체계적인 시스템 빌딩(system-building)이었다. 그럼 이러한 시스템 빌딩이 이미 古典경학을 일탈한 것이라면 분명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모델 즉 경학 밖의 레퍼런스의 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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