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남북전쟁의 원인을‘시민층 형성의 부재’- 남북전쟁의 원인은 흑인 노예해방 문제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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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 남북전쟁의 원인을‘시민층 형성의 부재’- 남북전쟁의 원인은 흑인 노예해방 문제 때문이 아니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s)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들은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 즉, 전시 채권의 일종인 「Green Back」을 북부의 자본가들이 북부에게 전쟁이 유리해지면서 사 모으게 되고 전쟁 후 이것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서부에서는 평원(Preiri)의 농지 개발과 농축산물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농지 개발, 기계화에 의한 농업혁명이 일어나는데 Corn Belt, Wheat Belt 등으로 나누어진 자본주의적 대량의 농업이 이루어진다. 또한 서부의 농산물과 동부의 공산품이 유기적으로 교환되면서 전체로는 북부를 형성하였고 링컨 시대의 농업 국가에서 전후 대공업국가로 약진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전쟁 직후 미국에서는 먼저 「산업화 시대(Age of Industrialization)」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시기의 등장은 철, 석유, 석탄 등 풍부한 자원과 풍부한 농산물 생산을 바탕으로 과학적 발명과 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 배경에 있다. 그리고, 미국인들의 진취적인 개척정신과 자연적인 증가 및 이민 등으로 인한 풍부한 노동력의 존재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고 보호관세, 기업 보조, 주간에 관세를 폐지하는 등의 국가의 공업 진흥정책에도 큰 힘을 입었다.
산업화 시대 다음에는 「실업 시대(Age of Business)」가 열리는데 이 시기는 작은 회사가 독립성 없이 큰 회사에 흡수 합병된 형태인 Trust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카르텔(Kartel)은 통합된 기업들의 독립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형태이다.) 이 시기는 1880년대부터 시작되는데 1882년에 석유 재벌인 Rockfeller는 Standard Oil Co.를 통해 석유를 독점 지배하였다. 그리고, 록펠러 가문의 제 3대 록펠러는 뉴욕지사를 역임하며 SUNY 제도(주립대학체제)를 최초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Duke가에 의한 Tabacco Trust가 있었고 J.P.Morgan에 의한 Bank Trust와 Railroad Trust가 있었다. 그리고, Andrew Carnegie는 U.S.Steel Co.를 통해 Steel Trust를 형성하였다.
또한, 전쟁 후의 이 시기는 공화당의 장기집권이 이루어진 「공화당의 시대」이기도 했는데 16대 링컨 대통령부터 1913년 태프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링컨을 승계한 부통령 존슨과 93년에서 97년 사이의 클리블랜드의 2명뿐이었다. 그리고, 장기 집권한 공화당과 기업가들 사이에서 결탁이 이루어지고 이것은 1870년에서 80년 사이에 극성을 이룬 「부패의 시대(Age of Corruption)」가 나타나게 만들었는데 이 시기 정부를 주도한 공화당은 남부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경제 정책은 북부의 대기업가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취한다. 링컨을 승계한 존슨의 뒤를 이어 전쟁 영웅인 그랜트가 69년에서 76년까지 18,19대 대통령을 역임하는데 그의 재임기간동안 부패는 극에 달했고 그는 남부를 북부에 민주당을 공화당에 종속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래서, 1890년대에 이르면 Anti-Trust Movement가 나타나는데 먼저, 1887년 의회에서는 「주간통상규제법」을 제정하여 재벌들이 주와 주 사이에서 철도를 통해 변형된 형태의 관세를 받는 것을 규제하였다. 그리고, 1890년에 상원의원인 셔먼(Sherman)이 「Anti-Trust Act」를 제정하여 트러스트를 불법화시키고 해체하게 된다. 그러나, 각 주에서는 실효를 거두지 못 했는데 1901년에 테오도르 루즈벨트가 나타나 트러스트를 완전하게 불법화시키게 된다. 1890년에서 1918년까지는 「개혁의 시대(Age of Reform)」라 하는데 이 시기는 셔먼의 반트러스트법이 실행되는 시기이다.
3.결론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이 서유럽과 같은 근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미국 내에 시민계층의 형성이 꼭 필요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일련의 정치적으로는 혁명을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시민계층이 형성되었고, 이와 동시에 민주주의 체제가 발전함으로써, 정치경제적으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정치행정 체제가 만들어졌으나, 민주주의 체제를 움직이는 시민계층의 형성은 이루어지질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잭슨이 표방했던 「잭슨 민주주의」는 이러한 시민계층의 형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또한 이러한 점을 의도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잭슨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미국의 시민계층 형성에는 실패한 것 같다. 사실, 잭슨 당시에 미국은 정치적으로는 연방주의자들과 주권분립론자로 경제적으로는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북부 측과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남부측으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연방의 권한을 중시하였던 잭슨은 오히려 남부의 입장을 반대하였고, 主權이 州에게 있는 것이 아닌 國民에게 있다는 「잭슨 민주주의」는 말하자면, 북부와 남부의 정치적 대립을 더욱 가속화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남부는 主權이 州에게 있다는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북간의 경제적 불균형과 이질적 경제체제 또한 서부개척과 영토의 확장은 남북간의 대립을 더욱더 극대화하였다. 미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민계층이 형성되어야 했지만, 대다수의 시민계층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아직도 시민계층의 형성에 절대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산업의 발달은 북부에 한정되어 있었고, 반면에 남부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농업을 위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부의 경제체제의 근간은 바로 노예제였다. 남부의 노예제를 폐지한다면, 농업체제였던 남부를 무너뜨릴 수 있으며, 해방된 노예는 도시의 노동력으로 값싸게 쓸 수 있다. 그러므로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결국,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났고, 노예제에 기반 한 남부의 농업은 몰락하고 남부도 공업화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남북전쟁이후에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국적인 산업화는 바로 시민계층의 형성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북전쟁의 진정한 원인은‘시민층 형성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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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2.26
  • 저작시기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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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99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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