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지배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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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후기 지배 세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기존의 연구성과

2. 권문세족
1) 용어의 구분과 각각의 용례 - 권문과 세족
2) 고려 후기 권력구조와 세족
3) 고려후기 세족의 역사적 성격 」

3. 신진사대부
1) 사대부의 성격과 용어에 대한 논의
2) 신진사대부의 대두 배경
3) 사대부의 성격과 시기구분 - 후기 사대부를 중심으로

본문내용

력으러서의 사대부의 성격을 역사적의미로 알아보겠다.
2) 신진사대부의 대두 배경
무신란 이후 고려의 지배세력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무신정권이 확립되는 최씨집권기에는 무신에 대한 견제와 아울러 문신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하여 최우·최항 집권기에는 문신들의 관직점유율이 증가 하였다.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절대적 지배하에서 文·吏 들을 출신여하를 불문하고 오직 그 능력을 기준으로 임용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전기의 文辭중심의 문신보다는 행정실무에도 밝고 새로운 관료가 요구 되었다. 흔히 말하는 능문능리형의 관리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文은 書·表를 잘 짓는 것 즉 왕의 교서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문장에 능한 것을 의미한다. 서나 표의 작성에 있어 중국의 역사 시문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했으며 그 바탕이 되는 경학의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경술도 포함된다 하겠다. 여기에 왕을 모시는 시종/관리 선발을 의미하는 선거 / 인물을 평가하여 등용하는 전주 까지의 업무를 주관하는 것이다.
吏는 일반적으로 서리의 말단 행정을 일컫는 말이지만 문과 출신자가 지방관으로 보임되어 처리하는 실무도 吏務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리의 범주는 단순한 서리·향리와 같늠 말단 행정사무에 그치는 것이 아닌 관리의 행정실무 전반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능문능리의 신관료는 고려후기 관인의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이에 부응하여 등장하는 후기 관료들은 문음출신 보다 과거 합격자 특히 吏屬층에서 많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신정권아래 관인으로 성장해 갈 수 있었던 지방의 향리 계층이 중앙으로 진출 할 수 있었던 배경은 고려후기의 농업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으로 보고 있다. 휴한법의 극복과 시설의 확충 그리고 水田의 개발 등은 국가 권농책의 일환으로 수령들에 의해 주도되기도 하였지만 재력을 가진 중소지주층이나 농민들에 의해서도 개간이 되어갔다. 후기에는 하삼도 지방의 과거합격률이 급격하게 증가하는데 이는 하삼도 지방세력의 경제력이 신장되어 중아으로의 진출을 용이하게 만든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한편 12세기에는 송에서 신유학으로서 성리학이 일어나 남송의 주희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원과의 관계가 긴밀해진 이후로 교류가 많아지며 주자성리학은 빠른 속도로 전래되었다. 성리학의 보급과 함께 14세기에는 과거의 과목에서 四書가 더욱 중시되었고 시·무 보다는 책문을 시험하여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과거를 운용하였다. 이에 지방의 儒者들은 성리학을 주축으로 하게 되었고 과거를 통한 신진관인의 등용은 좌주·문생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여 공고한 학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조건과 교육적인 기회는 지방출신 관인이 중앙으로 진출하는데 큰 힘이 되었고 이들이 14세기 중엽에는 정치적·사회적 기반을 확대시키고 지속적으로 성장·발전하여 새로운 정권 담당자로서의 사대부계급을 형성하는 태반이 되었다.
3) 사대부의 성격과 시기구분 - 후기 사대부를 중심으로
고려후기의 사대부의 성장·발전 과정을 세 시기로 나누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즉 12세기 말 최씨 집권기에 그 원형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성리학이 도입되기 시작한 13세기 말 충렬왕대부터 성리학의 수용이 본격화 되던 14세기 전반기에는 신진사대부의 모습이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신진사대부는 공민왕대에는 신돈 정권에 참여하였고, 성균관을 중심으로 학문을 진흥시키는 데 주역이 되면서 고려왕조의 멸망 전까지 성장·발전하였다. 위화도회군 이후 신진사대부는 다시 분기하여 온건파와 개혁파로 나뉘면서 개혁파는 조선건국의 주역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유교적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사대부의 현실 인식은 사회모순을 직시하고 개혁을 추진해 나가는 면에 있어서도 시기별로 크게 차이를 보인다.
제 1기 무신 집권기에는 사회모순에 대한 문제제기는 미약하며 이러한 모순을 직시하고 있던 부류들은 관료로서 중앙에 진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씨 집권기에 문신들은 체제에 아첨 또는 타협하는 입장이었던 반면에 대외적으로 몽고와의 항쟁과정에서 민족의식의 발로로 국조 단군이나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존재를 부각시켜 민족의 자주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제 2기에는 원과의 새로운 관계 이후 고려 왕실의 위상이 격하되고, 국왕 측근의 비정통적 관료들이 권세를 장악하고, 정치를 농단하던 시대이다. 이 때에는 원 제국의 정치 간섭과 경제적 수탈 속에서 고려의 민족자존을 유지하고, 정통적 체제를 최대한으로 지켜나가는 것이 이 시기 사대부들의 지상 최대 관심이었다. 이 시기 정국은 충렬왕 이후 안으로는 직위와 퇴위를 반복하는 잦은 왕위의 교체와 근왕 세력의 횡포가 자행되는 가운데서 사대부들은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근왕 정치 기구를 혁파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왕도 정치를 이룩하는 것과 민생의 안정을 목표로 하는 등 개혁 정책을 제시하였다.
제 3기에는 공민왕대에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압력을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해나가는 과정에서 공민왕이 즉위하는 데 있어 혁혁한 공이 있는 이제현을 좌주로 한 신진사대부들의 세력이 크게 대두된 시기이다. 이제현의 뒤를 이은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자 사대부들은 성균관을 중심으로 학문을 일으키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충선왕대 이후에 계속된 개량적인 개혁조치에 대하여 사대부들 가운데서는 더욱 과감한 근본적인 개혁정책들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개혁파와 체제유지내에서 개량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파로 분리가 되어갔고 이중 급진개혁파는 조선건국을 하는 주체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1) 김광철,「서론-권문 세족의 용례」,『고려후기세족층연구』,부산,동아대학교 출판부,1991 1~47쪽
2) 김광철, 「권문세족의 성립과 그 성격」,『한국사 19-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6
3) 고혜령, 「고려후기 사대부의 개념과 성격」,『허선도선생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4) 고혜령, 「신진사대부의 대두와 그 성격」, 『한국사 19-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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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2.29
  • 저작시기2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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