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 운동의 시대적 배경과 6.10 만세 운동의 준비, 6.10 만세운동의 전개와 영향, 6.10 만세운동의 한계와 역사적 의의, 인물조사(권오설, 김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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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6.10 만세 운동의 시대적 배경과 6.10 만세 운동의 준비, 6.10 만세운동의 전개와 영향, 6.10 만세운동의 한계와 역사적 의의, 인물조사(권오설, 김단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6.10만세운동의 시대적 배경

3. 6.10 만세 운동의 준비
 (1) 투쟁지도부의 결성과 6.10 만세시위투쟁 방침
 (2)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전선통일’시도와 반제민족통일전선의 모색
 (3) 6.10 만세시위투쟁의 격문․슬로건과 인쇄작업
 (4) 지방조직망 건설과 학생조직화 사업

4. 6.10 만세운동의 전개

5. 6.10 만세 운동의 영향

6. 6.10 만세 운동의 한계, 역사적 의의

7. 인물조사
 (1) 권오설
 (2) 김단야

8.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과 전략방침이 수립되지 않고서는 통치를 강화해 오는 제국주의자를 결코 분쇄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7. 인물조사
(1) 권오설
권오설은 1920년대 사회운동과 6.10만세 운동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민족운동가였다.
불과 6.7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20대의 청년 권오설은 1920년대 안동지역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의 선구자로서 중앙 무대에서는 조선 노농총동맹을 비롯한 대중운동과 고려 공산 청년회와 조선 공산당원 지도자로서, 또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추진한 핵심 인물로 민족운동사에 귀중한 업적을 남겼다.
각 방면에서 전개된 그의 활동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유기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었으며 6.10 만세 운동의 추진은 그 같은 운동 경험의 축적 위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권오설은 1897년 경북 안동 풍서면 가곡리에서 출생했다. 3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던 권오설은 어려서 부친이 운영하던 한문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권오설의 아버지는 유학을 숭상하면서도 전통 한학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 같은 배경에는 이 무렵 협동학교를 중심으로 안동에 개화 바람이 크게 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동화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생활고에 시달려 일본인의 소래를 받아 전라남도 도청의 고용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3.1운동을 맞이하게 되고 만세시위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6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때 그에게 식민지 민족현실을 인식케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 후 권오설은 안동으로 돌아가 사회계몽운동, 교육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 후 권오설은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총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일약 조선노농총동맹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권오설은 표면으로 조선노농총동맹을 이끌면서 내면에는 조선공산당과 고려 공산 청년회에 깊게 관여하였다. 그 후 1925년 11월 22일, 신의주 사건으로 1차 조선 공산당의 주요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는 상황에서 권오설은 박헌영에 이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를 맡았다. 그 후 많은 활동을 하였고 6·10 만세사건을 계획하였고,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옥고를 치르다 1930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장석흥, 『 권오설의 민족운동 노선과 성격,』한국근현대사학회,2001년, 207~223
(2) 김단야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김천이다. 김단야가 처음 민족의식을 행동으로 나타낸 것은 대구 계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6년에 미국인 교장과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는 동맹휴학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이어 1919년 1월, 서울 배재 고등보통학교에서 졸업을 앞두고 있던 김단야는 비밀리에 반일 학생 써클에 가입함으로써 “혁명적 삶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비합법 유인물의 발간에 관여하는가 하면 고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1919년 12월에 상해 망명의 길을 택한 후 민족해방을 위해 사회주의자가 된다. 김단야는 상해에 있던 한인 공산당과 고려공산당청년에 가입했다. 그 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와 극동청년대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가하여 레닌을 만나게 된다. 레닌을 만난 후 민족해방에 대한 신념을 사회주의와 결합시키는 것의 정당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이후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신념을 실천하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
1922년 3월 무렵 고려공산청년회에서 박헌영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김단야는 귀국 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다. 출옥 후 많은 활동을 벌이다가 1차 조선 공산당 검거사건으로 박헌영 등이 체포되자 상해 망명을 결심한다. 망명을 결행하기 전에 당시 고려 공청의 중앙위원 권오설에게 후계활동을 위임했다.
상해 체류 시절 김단야의 활동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6.10 만세 운동이다. 1926년 4월, 순종이 사망하자 김단야 등 상해의 조선공산당 간부들은 국내에 남아있던 권오설 등과 연락을 취해 순종의 장례일을 이용해 대규모의 반일대중시위를 일으킬 것을 결정했다. 더나아가 김단야는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대중을 시위에 동원하기 위한 선전격문을 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6.10 만세운동 과정에서 2차 조선 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고 상해에서 활동도 제한을 받게 되자 김단야는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상해와 모스크바 귀국을 계속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하엿다. 그 후 소련에서 1937년 11월에 체포된 후, 1938년의 어느날 일본제국주의 첩보기관의 밀정으로 반혁명활동을 벌인 1급 범죄자라는 혐의를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준식, 『다시 기억하는 혁명가 김단야의 삶 ,내일을 여는 역사 제22호』, 2005. 12 150~158쪽
8. 맺음말
6.10 만세 운동이 우리 나라 독립 운동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중요성에 비해 덜 다뤄져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6.10 만세운동과 실제 여러 가지 자료에 나와 있는 내용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1920년대 초 극단의 계급 지상주의를 극복하고 있었으며, 민족적 관점과 계급적 관점이 민족혁명을 위해 결합된 이념과 노선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통일 전선운동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권오설 그가 추진했던 6.10 만세운동은 천교도와 조선공산당 학생층 등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다른 정치 이념을 추월하여 깊은 연대 아래 계획 추진되었던 점에서 3.1 운동 이후 통일전선 운동으로 나아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 민족운동사」, 1990
장석흥,「내일을 여는역사」,2003
윤석수, 역사 문제 연구소,「역사비평」,1989
홍식, 풀빛, 「이야기 한국역사」, 1997
류승렬, 솔출판사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깊은 이야기」, 2003
장석흥, 한국근현대사학회,『 권오설의 민족운동 노선과 성격』2001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8」1990
이준식, 『다시 기억하는 혁명가 김단야의 삶 ,내일을 여는 역사 제22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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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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