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샬 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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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마샬 플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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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가지 점들을 기본적으로 핵심적인 전제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1946년의 개념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45
1947년 6월 29일부터 7월 2일 사이에 개최되었던 영국프랑스소련간의 3국의 외무장관회의가 결렬되자, 서유럽 16개국은 7월 12일부터 파리에서 16개 국가의 회의를 여고, 「유럽경제협력회의」(Committee on European Economic Cooperation: CEEC)를 설치하여 운영해 나갔다. 참가국들은 오스트리아벨기에덴마크프랑스그리스아일랜드아이슬란드이탈리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노르웨이포르투갈스웨덴스위스터키영국 등 16개국이었다.46 이후 유럽경제회의에는 서방점령지역 독일이 참가하다가 1949년 점령기간이 끝나게 되자, 연방공화국 정부(서독)가 독일을 대표해서 참가하였고, 유고슬라비아도 공산진영으로부터 추방당한 후인 1949년부터 참가하게 되었다.47
1947년 7월 12일 파리회의는 처음 며칠간의 화기애했던 분위기는 유럽재건계획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의견 충돌로 얼마 가지 못했다. 그것은 유럽국가들이 그 계획을 제안하는데 있어서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과 마샬 플랜에 대한 원조액수를 미의회가 승인해야 하고, 또 실질적인 원조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견해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한편 미국은 마샬 플랜의 입법화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미의회는 1948년 4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의 포괄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가 있었다. 미국의 경제협력법은 1948년 4월 3일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공식적인 법적 효력을 얻게 되었다. 이를 근거로 미국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16개 국가들과는 물론이고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한국과 쌍무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마샬 플랜에 의한 원조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이 조약에 의해 4월 16일 마샬 플랜에 참가하는 유럽국가들은 미국의 대외원조기관인 경제협력처와 관계를 유지할 「유럽경제협력기구」(Organization for European Cooperation : OEEC)를 신설하였다. 이로써 마샬 플랜은 발표된지 10개월만에 경제협력법의 승인을 거쳐 유럽재건을 위한 원조의 길을 열게 되었고, 경제협력처와 유럽경제협력기구를 통해 자원의 원활한 분배와 효율적인 이용에 기여를 하였다.48 이로써 유럽의 재건과 공산주의의 팽창저지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마샬 플랜에서 만들어진 「유럽경제위원회」를 발판으로 1949년「유럽위원회」, 「북대서양조약기구」49(NATO)가 창설되어 대부분에 서유럽 국가들을 흡수했다. 그리고 1950년에 「슈만 플랜」50을 이끌어 서유럽이 하나의 공동체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다. 「유럽경제협력기구」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유럽공동체기구였으며, 유럽통합의 모체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51(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에 영향을 주었다. 요컨대 유럽을 하나로 만들어 평화와 번영을 이루고자는 유럽이념이 실현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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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2
  • 저작시기2013.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2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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