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1930년대 농민운동 - 농민운동의 배경과 성격, 농민운동의 전개과정, 소작쟁의, 지하투쟁시기의 농민운동과 항일투쟁시기의 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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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1930년대 농민운동 - 농민운동의 배경과 성격, 농민운동의 전개과정, 소작쟁의, 지하투쟁시기의 농민운동과 항일투쟁시기의 농민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농민운동의 배경과 성격

3. 농민운동의 전개과정

4. 소작쟁의

5. 지하투쟁시기의 농민운동(1930년~1935년)

6. 항일투쟁시기의 농민운동(1936년~1945년)

7. 맺는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농민조합운동은 아래로부터 통일전선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어 민족개량주의자를 주요 타격방향으로 삼는 등 일정하게 ‘좌편향’을 드러냈다. 30년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일제가 수많은 활동가들을 검거하면서 무너져갔으며 40년대에 일어난 농민들의 자생적인 투쟁을 잘 이끌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벌이면서 민족해방운동에서 농민운동이 큰 몫을 차지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농민 출신이 선진 활동가로 되는 일을 도왔다. 또 이 운동 경험은 해방 뒤에 전국적인 농민 조합과 인민위원회로 터져나왔다.
1차 농조운동 시기(1934년 4~)
특별한 ‘지역전위 정치조직’을 경성하지 않은 채 몇몇 선진적인 활동가들(지역활동가 그룹)의 주도로 ‘농민조합운동 명천좌익’이라는 혁명적 농조 준비조직을 결성하고, 이를 매개로 이 지역의 혁명적 농조 건설 운동을 지도 하였다.
2차 농조운동 시기(1935년 6~)
1차 농조운동을 통해서 혁명적 농조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어느 정도 마련되자 농민, 노동자, 어민 대중운동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당재건 준비위원회’ 즉 ‘지역전위 정치조직’을 정식으로 경성한다. 그리고 그 산하에 각 부분 대중운동의 준비조직(예컨대 농민조합운동 명천좌익)을 두고 이를 매개로 명천지역의 혁명적 농조 건설운동을 지도 하였다. 그러다가 활동이 여의치 않자 다시 ‘당재건 준비위원회’를 해소하고 ‘공청그룹’을 조직한 뒤 이를 매개로 이 지역의 혁명적 농조건설운동을 지도하였다.
3차 농조운동 시기(1936년 7~)
2차 농조가 해체지경에 이르자(공청그룹도 해체된 것으로 보임)농조재건준비조직인 ‘적색농민조합운동 명천좌익 중앙조직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농조 재건설운동을 전개 하였다.
6. 항일투쟁기의 농민운동(1936년 ~ 1945년)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 교육부, 『한국민족 독립운동사 9권』, 81쪽~82쪽
이 시기의 농민운동을 특히 항일투쟁기라고 칭하는 것은 전시체제 하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하 항일 민족운동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1937년 함경도일대에서 항일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여 조국광복회에 가입하였다. 일제는 함경남북도 일대에 대해 철저한 탄압을 가하였으나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결집한 민중을 무장독립항쟁을 계속하면서 항일 유격전을 확대 시켰다.
이와 같은 항일운동에 있어 농민이 그 중심이 되었고 이와 같은 항일 농민운동은 소작료 인상소작권 박탈에 반대하는 대 지주투쟁과 함께 농산물의 강제공출, 노동력의 강제동원, 군수농작물의 강제재배 등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하는 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이러한 한국농민의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에 항거하는 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이러한 한국 농민의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에 반대하는 투쟁은 각종의 합법비합법의 활동을 통해 해방의 날까지 끊임없이 완강하게 계속되었다. 이처럼 농민들은 어느 계층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일제가 패망할 날까지 계속 항일 투쟁을 용감하게 전개하였던 것이다. 농민운동이 소작쟁의를 중심으로 하는 대 지주투쟁의 운동만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동학의 후신으로서 주로 농민이 신도였던 천도교는 31운동 이후 농민운동과 같은 문화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천도교에 의한 농민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리고 농민들은 전통적인 계조직의 정신과 조직관행을 바탕으로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협동조합운동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전개한 것으로 소비품의 염가구입과 생산품의 공동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농민소비조합 뿐 아니라 천도교 조선 농민사에서 운영한 농민공생조합도 크게 발전했는데 농민공생조합은 소비조합의 기능 외에 생산 공장까지 운영하여 농민들의 경제자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자료] 단천과 명천의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을 보도한 신문 기사 역사문제연구소 지음,『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웅진출판, 266쪽
1930년대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3000여명의 농민들이 대규모 항일 투쟁을 일으켰다. 이 투쟁에 당황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수많은 농민들을 검거, 투옥, 또는 학살하였지만 단청의 농민들은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여 싸웠다. 혁명적 농민 조합운동은 함경도 정평, 영흥, 명천 등지에서도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7. 맺는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10권』, 454쪽
이 와같이 침략전쟁의 확대, 전시체제의 강화, 발악적인 식민통치 등의 심화, 이러한 것은 곧 일제 패망의 징후이기도 했던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위 산미증식 계획(産米增殖計劃)이 크게 동요되어 총독부농업정책은 그 방행을 상실하고 만다. 1933년 일본 내의 미곡통제법(米穀統制法)한국 쌀 수출의 실이 막히고, 일제의 저미가정책(低迷價政)으로 한국 내 지주들을 옹호하던 총독부는 군색한 나머지 농촌진흥방침(農村振興方針)이라는 것을 세우고, 소위 자력갱생 운동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효과를 기대할 것은 못되었다.
오히려 이것으로 한국농민운동은 큰 차질을 초래하게 됐다. 소위 진흥운동의 조직이 마을마다 확대되니 농민 자생적인 단체의 해체가 강요되었고, 진흥운동이란 명목 아래 농민운동이 모두 봉쇄당했던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진영의 농민운동도 지하로 잠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1930년대 후반기부터의 특징이라 하겠는데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의 실기와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의 조직이 전국적으로 펴져간 1939년부터는 더욱 철저하게 잠적하게 되었고, 특히 농촌진흥회와 국민정신 총동원연맹 조직이 통합되어 국민총력 조선연맹이 되는 1940년에 이르면 농민운동의 잠적한 조직조차도 발을 붙이고 있지 못할 상황이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0권』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역사학연구소 지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사
대한민국 교육부,『한국민족 족립운동사 9권』, 국사편찬위원회
(표1) 역사문제연구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웅진출판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 교육부, 『한국민족 독립운동사 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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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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