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차 (茶)> 우리나라 차의 역사 - 우리나라 차의 전래(인도차 전래설, 중국차종 도입설, 자생설) 및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차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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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사] <차 (茶)> 우리나라 차의 역사 - 우리나라 차의 전래(인도차 전래설, 중국차종 도입설, 자생설) 및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차문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우리나라 차의 전래
 1) 인도차 전래설
 2) 중국차종 도입설
 3) 자생설

2.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차문화
 1) 고려시대
  (1) 고려시대의 차문화
   가. 귀족과 선비들
   나. 서민들의 다생활
   다. 승려들의 다생활
  (2) 고려 시대의 차와 관련된 것들
 2) 조선시대
  (1) 조선시대의 차문화
  (2) 조선시대에 차가 쇠퇴한 원인

참고문헌

본문내용

간 공백기를 거치게 된다. 그 후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선사(艸衣禪師)와 다산(茶山) 정약용, 추사(秋史) 김정희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차문화 중흥이 계기가 되어 후기에는 다시 차문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또다시 우리의 차문화는 빚을 잃게 되었다.
조선이 건국하자 고려의 유신들은 산 속으로 은거하고, 선승들마저 배불숭유 정책에 밀려 산 속으로 피해 들어간다. 그래서 조선 초에는 산 속에 은거한 선비들과 선승들에 의해 계승된 차문화가 생겨나게 된다.그리고 조선의 개국공신들은 관인으로 남아 차 생활을 하게 된다. 그래서 관인문화와 은둔 문화로 나뉘게 된다. 이것을 관인차와 은둔차라고 한다.
관인차는 다시(茶時)제도를 만들어 내어 하루에 한차례씩 모여 차를 마시면서 정사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사헌부 관원들이 부정한 관리를 발견하면 탄핵할 때 밤에 다시를 했다. 이것을 야다시(夜茶時)라고 한다.이 때 차를 끓여 주는 일을 담당한 사람을 다모(茶母)라고 한다. 임금의 차 시중을 드는 사람은 상다(尙茶)라고 하고 고급 관청의 차 시중은 다색(茶色)이라 하고 하급 관청의 차 시중은 다모(茶母)가 들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차문화가 쇠퇴하여 차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영조(英祖)는 왕명을 내려 차 대신 술(酒)이나 끓인 물로서 대신하라고 하였다. 그 이후에 우리나라에서는 관혼상제(冠婚喪祭)때나 명절 때에 차 대신 술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차문화는 쇠퇴를 했지만 명맥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궁중에는 궁중의 법도에 맞는 다례의식이 있었다. 이것을 궁중다례라고 한다. 그 의식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일반 사대부들은 관혼상제를 모두 사례편람(四禮便覽)에 의거하여 다례를 지냈으며, 사원에서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운수단(雲水壇)과 백파선사(白坡禪師)의 구감(龜鑑)에 근거하여 다례를 지내었다. 이처럼 의식만 남고 문화는 쇠퇴한 상태로 계승되었다.
1805년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차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1805년 신유사화(辛酉士禍)로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큰 학승이었던 혜장(惠藏)스님을 만덕산의 백련사(白蓮寺)에서 만나게 되고 혜장의 주선으로 강진에서 멀지 않은 우이산 우두봉에 위치한 고성사로 거처를 옮겨 보은산방(寶恩山房)이란 현판을 걸었다. 열 살아래인 혜장과의 만남은 다산에게 있어서 반가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그 때 다산은 차(茶) 와 선(禪)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이곳 다산초당은 훗날 다산의 발자취를 찾은 후학들의 성지가 되었다. 1818년 다산의 강진 생활이 마무리되던해에 그의 제자들이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차모임이라 볼 수 있다.
다산과 혜장이후 조선시대 차생활의 맥은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와 초의선사(草衣禪師)로 이어진다. 1809년 추사는 동지사로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가서 당대의 큰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경학(慶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때에 차생활의 진수를 몸에 익히고 돌아왔다. 그후 고증학의 도입을 시도하면서 많은 친구들에게 차마시기를 권하며 스스로를 승설학인(勝雪學人)이라 칭하기도 했다.
초의가 다산의 아들인 유산(酉山)의 소개로 추가를 만난 것은 이때로서 한양에 초대받은 초의는 두해동안을 장안에 머물면서 유산과 추사를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과 교분을 맺었다. 다시 해남으로 돌아온 초의는 그 후 해마다 봄이면 정성들여 차를 만들어 추사에게 올려 보냈다. 그렇게 추사에게 보내진 차는 한양의 지체높은 선비들에게 퍼졌고 차를 마시는 자리마다 초의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초의는 이를 계기로 중국의 [만보전서(萬寶全書)] : 조선 후기에 중국의 역사·서식(書式)·오락·풍속·명구·해몽등에 대한 사항을 한문으로 해설하고 한글로 번역한 유서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차에 관한 기록을 뽑아 다신전(茶神傳)을 썼다. 그후 추사를 통해 알게 된 해거도인 홍현주의 부탁으로 ‘동차(東茶)’ 곧 ‘한국의 차’를 찬미하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여 다서의 불모지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다시 중흥의 기미를 보이던 차문화는 한일 합방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로 말미암아 다시 빛을 잃고 암흑 속에 묻히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일본의 차문화를 한국에 심기 위해서 우리나라 차문화 연구와 교육에까지 손을 대 의무적으로 여학교에서 일본다도 교육을 실시하였다.
(2) 조선시대에 차가 쇠퇴한 원인
우리나라에서 차가 쇠퇴한 원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생수(生水) 맛이 좋고, 다음으로 숭늉과 담배, 술 등의 만연(漫然)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식후 차 대신 구수한 숭늉을 실컷 마시기 때문에 차를 마셔야 할 필요를 덜 느꼈다. 또 『인조실록』 :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재위 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 1623년 4월부터 1649년 5월까지 인조의 재위 26년 2개월간의 국정 전반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50권 50책. 활자본. 정식 이름은 ‘인조대왕실록’이다. 조선시대 다른 왕의 실록과 함께 일괄해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인조실록』에 보면 광해군 8년에 담배가 들어옴을 알 수 있는데 담배를 연차(煙茶)라 할 만큼 그 용어부터 차와 일치시켜 놓고 차를 대신한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둘째, 술, 이른바 막걸리다. 텁텁한 곡주 막걸리는 차를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손님이 오면 으레 차 대신 막걸리가 나왔고, 조선시대 말 선승(禪僧)인 일옥(一玉) 진묵대사는 곡차(穀茶)라는 이름이 아니면 막걸리를 마시지 않기도 했다는 일화를 봐도 잘 알 수 있다.
셋째, 유교의 불교에 대한 탄압 정책을 들 수 있다. 차를 좋아한 불교가 유교에 밀려 쇠퇴한 것이다. 또한 주자학의 강세와 함께 사원에 중세(重稅)를 과함은 물론 관리들이 차를 공출해 상납시키는 바람에 관리들의 등쌀이 귀찮아 지역에 따라서는 차나무를 없애버리는 곳도 있었다.
참고문헌
노무라미술관 저, 다도와 한국의 전통 차문화, 아우라 2013
황교익 저, 한국음식문화 박물지, 따비 2011
정서경 저, 한국 차 문화, 월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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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7.01
  • 저작시기2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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