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전쟁사 - 항일 의병전쟁 : 항일운동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 독립군 항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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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민족 전쟁사 - 항일 의병전쟁 : 항일운동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 독립군 항일 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항일 의병전쟁
 1) 을미의병
  ① 을미의병의 배경
  ② 을미의병의 양상
  ③ 을미의병의 결과
 2) 을사의병
  ① 을사의병의 배경
  ② 을사의병의 양상
  ③ 을사의병의 결과
 3) 정미의병
  ① 정미의병의 배경
  ② 정미의병의 양상
  ③ 정미의병의 결과

Ⅲ. 독립군 항일 전쟁
 1) 독립군 항일 전쟁 배경
 2) 독립군 항일 전쟁 양상
  ①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
  ②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
  ③ 쌍성보 전투[雙城堡戰鬪]
  ④ 영릉가성 전투[永陵街城戰鬪]
  ⑤ 보천보 전투[普天堡戰鬪]

Ⅳ. 결론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본문내용

딩차오[丁超]와 만나 연합전선을 결성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듬해 2월 일본군과 만주군의 공격을 받은 독립군은 1932년 8월 14일 카오펑린[考鳳林] 부대와 합작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쌍성보를 공격하였다. 한.중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많은 물자를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중국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쌍성보는 다시 일본군에게 돌아갔다. 전열을 재정비한 한. 중연합군은 11월 17일 쌍성보를 다시 공격하여 일본군을 섬멸하고 만주군 전원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어진 일본군 주력부대와 만주군의 반격에 밀려 쌍성보를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④ 영릉가성 전투[永陵街城戰鬪]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고 일본군과 만주군이 합동하여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본격화하자, 만주의 독립군은 중국군과 한 ·중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남만주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은 중국당국과 연합항일문제를 논의하는 한편, 조선혁명당 소속 조선혁명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32년 3월 11일 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은 3개 중대를 인솔하고 중국의용군 왕동헌(王軒) ·양석복(梁錫福)부대와 합세하여 무순(撫順) 천금채(千金寨)로 진군하다가 12일 신빈(新賓) 남쪽의 두령지(嶺地)에 도착하여 야영하였다.
이때 신빈현성(新賓縣城)의 일본군이 정보를 탐지하고 한 ·중연합군을 공격하였다. 주변지리에 익숙한 연합군은 교전 1시간 만에 일본군을 격퇴하고 추격하여 30여리 떨어진 영릉가성을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영릉가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다시 추격전을 감행하여 상협하(上夾河)까지 점령하였다. 5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말과 무기를 버리고 패퇴하였다.
⑤ 보천보 전투[普天堡戰鬪]
당시 백두산 일대 조선과 중국 간의 국경지역인 장백을 중심으로 항일투쟁활동을 벌이던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보천보에 침투하였다. 그들은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조선민중에게 알린다,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등의 포고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물자를 노획하였다. 이때 일경 7명이 죽었으며 여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탄압이 극심하였던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크게 보도되어 조선인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고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Ⅳ. 결론
우리나라 역사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보다 가장 치욕적이고 암울했던 시기는 아무래도 일제강점기인 듯싶다. 우리의 선조들은 임진왜란 때 나라가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여있을 때 농기구를 들고 의병을 일으켜 적에 항거했듯이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도 선조들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발 벗고 유생들은 책 대신 농민들은 농기구 대신 총을 들고 일제에 항거하였다.
항일의병전쟁은 초기에는 즉 을미의병 때는 유생들이 주도한 의병이여서 평민이 주도로 한 의병전투는 보기 힘들었지만은 을사의병 때는 을사조약으로 인해 군대가 해산되면서 정식으로 훈련받은 군인들이 대거 의병들의 참여하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의병전투에 활약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규율이 엄하고 유격전술에 뛰어나 많은 전적을 올린 신돌석 장군의 부대가 있다. 이렇게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여 정미의병 때부터는 의병활동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독립군 항일전쟁은 국내에서 더 이상 활동을 못하게 되자 중국 등 만주지역에서 활동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한 것으로 많은 전투가 있지만은 크게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있다. 특히 김좌진 장군이 이끈 청산리 전투는 백두산의 험한 지리를 잘 이용하여 적을 청산리로 유인, 적을 격퇴한 것으로 지리적 이점을 잘 이용한 전투라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쌍성보 전투, 경박호, 대전자, 영릉가, 보천보 전투가 있다.
이렇게 항일 의병전쟁과 독립군 항일 전쟁은 온 백성들이 한 뜻이 되어 조국을 위해 희생한 전쟁이다. 나는 이러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본받아 나도 만약에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기꺼이 이 한 목숨 바칠 수 있도록 하여야겠고, 이 주제에 대해 짬짬이 연구해보고 공부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고종황제와 한말 의병』, 선인, 오영섭 지음
-『의병과 독립군의 무장독립운동』, 지식산업사, 신용하 지음
  • 가격2,3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4.07.12
  • 저작시기201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2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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