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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항쟁][의병문학][의병 가사][의병 민요][의병 수필][의병 한시]의병항쟁과 의병문학, 의병 가사, 의병 민요, 의병 수필, 의병 한시 심층 분석(의병항쟁, 의병문학, 의병가사, 의병민요, 의병수필, 의병한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의병항쟁과 의병문학

Ⅱ. 의병 가사
1. 의병 참가의 권유
2. 왜병의 앞잡이에 대한 효유
3. 의병의 사기 진작
4. 의병활동의 체험 토로

Ⅲ. 의병 민요

Ⅳ. 의병 수필
1. 의병수필의 존재
2. 의병수필의 특성

Ⅴ. 의병 한시

참고문헌

본문내용

을미의병 때 김천에서 이은찬 등과 같이 기병하였다가 진천에서 임금의 칙명을 받들어 부대를 해산하고서 애통한 마음을 토로한 작품이다. 초기의 의병 항쟁은 위정척사운동을 무력항쟁으로 발전시킨 것이며 그들은 국권을 침탈한 왜적의 토벌, 단발령 등 일본에 의해 강요된 개혁의 거부, 매국적 친일분자의 처단을 천명하였다. 그래서 친일내각의 김홍집 등이 살해되고 개화세력이 주도한 개혁이 중단되었으며 특히 임금의 해산명령이 내리자 왕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친일내각 대신 친로내각이 들어섰으며 국왕은 외국 공관에 피신하고 일본세력이 완전히 퇴치된 것도 아니었다. 허위는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휘하 장병을 타일러서 해산시켰으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국권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나라 위해 일어선 백성을 해산시키는 처사에 대한 안타까움과 통분의 심정을 이와 같이 나타낸 것이다.
생위천지장부아 천지간에 사나이로 출생하여
삼십치아여철추 서른까지 치아가 송곳 같았다
막염교근의주사 나물뿌리 달게 씹어야 일을 이루고
상사담육가제수 왜놈 고기 삼킬 생각해야 원수 없앨 수 있다.
이는 허위가 1907년에 지은 발병치유감의 앞부분이다. 그는 정미의병 때 다시 의병을 일으켜서 10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릴 정도로 세력이 성하였으며 13도창의연합진을 주도하여 서울로 진격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쳐들어 가는 등 맹활약을 하였다. 위의 작품은 이 시기에 지은 것으로 일본놈 살을 씹어 삼킬 마음으로 싸워야 원수를 죽여 없앨 수 수 있다고 하여 왜적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다지고 있다. 허위는 전형적 유학자이며 고위 관직에도 오른 바 있으나 그의 작품에는 늘 무인다운 기개가 넘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많은 시문 저작은 유실되고 <왕산선생문집>에 우국충정과 기개를 노래한 한시 16수가 있다.
이강년, 이인영, 허위 등과 같이 항일투쟁을 전개한 인물로 이은찬(1878-1909)이 있다. 그는 양평 출신 유생으로 을미의병 때 홍천에서 봉기하였고 정미의병 때 이인영, 이강년, 허위 등과 함께 서울진격을 결행하였으며 뒤에 병세의 부진으로 간도에 들어가 양병하려 했으나 밀정의 고발로 체포되어 다음과 같은 임절시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일지이수작위선 오얏나무 한 가지로 배를 만들어
욕제창생박해변 창생을 건지고자 바다로 떠났으나
미득촌공신선익 한 치 공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빠졌으니
수산동양락만년 그 누가 동양 만년락을 도모하리오
의병전쟁 초기부터 일어나 줄곧 항전을 계속한 것을 오얏나무 가지 하나로 배를 만들어 온 겨레를 건져내고자 하였다고 표현하여 그 일이 처음부터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음을 말하고, 그러나 자기 한 몸을 바쳐 싸웠는데 스스로는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다고 하였다. 동양 평화는 조선이 주권을 되찾아 독립함으로써 이룩되는 것인데 동족에게 배신당하고서 죽음에 임하여 침몰 직전에 있는 나라를 걱정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나타나 있다. 다음은 영남의 의병장들이 남긴 한시를 살펴 보기로 한다. 먼저 부자 의병대장으로 유명한 영천 산남의진의 정환직, 정용기가 있다. 정환직(1854-1907)은 영천 출신으로 벼슬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았는데 고종의 밀지를 받아 아들 용기에게 지시하여 산남의진을 편성하였다. 이 때 고종과 의병대장 허위는 군자금을 지원하였으며 영덕에서 봉기한 신돌석 부대와 긴밀히 협조하여 영천, 청송 등지에 싸우고 강릉을 목표로 진격하다가 영일에서 일본 수비대와 격전이 벌어져 정용기가 전사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정환직은 아들에 이어 2대 산남의진대장이 되어 청하, 흥해, 신녕, 의흥, 영덕 등지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영덕에서 체포되었다. 64세의 늙은 의병대장 정환직은 영천에서 조복을 입고 태연히 최후를 마쳤다. 다음은 정환직의 절명시이다.
신망심부변 몸이 죽다한들 마음이야 변할소냐
의중사유경 의리가 중하니 죽음이야 오히려 가벼운 것
후사빙수탁 남아 있는 뒷일을 누구에게 맡길거나
무언좌오경 새벽에 홀로 앉아 할 말을 잊었노라
자식을 나라에 바치고 뒤를 이어 자신도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비록 몸은 가더라도 나라 위한 마음은 변할 수 없다는 절의를 다지고 의리가 소중할 뿐 목숨이야 가벼운 것이지만 다만 남아 있는 부하들과 나라가 걱정된다고 하였다. 전사한 아들의 부대를 이끌고 원수와 싸우다 순국하는 노병의 눈물겨운 충정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정환직의 유언에 따라 흥해의 선비 최세윤이 3대 산남의진대장이 되었다. 일찍이 전기 의병 때 안동 의병진의 좌익장으로 활약한바 있으며 고향에서 후진을 가르치다가 산남의진의 대장이 된 그는 일본군의 신무기를 당할 수 없자 부대를 소규모로 분산 편성하여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영천, 영일, 경주, 청송 일대에서 1910년까지 전투를 계속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스스로 음식을 끊고 순국하였으며 아들 山斗도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절명시는 다음과 같다.
국가파망이유년 나라 망한지 이미 몇년이 되었는데
상존일루괴창천 아직도 한 가닥 목숨 붙어 하늘에 부끄럽구나
장부자차지귀소 대장부 이제는 돌아갈 바를 알았으니
은유이제제유전 은나라 백이 숙제 제나라 전횡이로다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분연히 떨쳐나섰으나 사태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고 전과에 따르는 희생은 엄청난 것이었으며 결국 몸은 적에게 잡히고 나라도 망하자 살아있는 것이 부끄럽다 하고 주나라 곡식 먹지 않고 굶어 죽은 백이 숙제와 한나라에 저항하여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잃은 충신 전횡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적의 음식을 거절하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 시골 선비의 애절한 충절이 나타나 있다.
참고문헌
강재언 - 반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전개 1970, 한국근대사연구, 한밭, 198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 조선폭도토벌지, 독립운동사자료집 제3집, 1974
조동걸 - 한말의병전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편 - 의병전쟁연구 상, 지식산업사
홍순권 -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서울대출판부, 1994
홍순영 - 한말의병운동의 성격 1905년 이후의 의병운동을 중심으로, 아세아학보 17집, 아세아학술연구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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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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