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과 영남지방 의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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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왜란과 영남지방 의병항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임진왜란 이전의 국내정세
1. 영남지방의 사회·경제적 상황
2. 영남지방의 군사적 상황
Ⅲ. 임진왜란기의 의병
Ⅳ. 임진왜란 초기 영남지방의 전투 상황
Ⅴ. 임진왜란 당시 영남지방의 의병활동
1. 김면∙정인홍의 의병활동
2. 곽재우의 의병활동
3. 김성일의 의병지원활동
Ⅵ. 결론

본문내용

붓에 먹을 적실 겨를도 없었다고 한다. 이 격문에 대해서 『선조실록』의 사관은 선조28년 2월6일조에서 “김성일이 지은 초유하는 격문은 충의가 북받치고 말뜻이 격렬하였으므로, 아무리 어리석은 남녀조차도 그 말을 들으면 반드시 모두가 마음이 동해서 눈물을 떨구었다”고 논평하였다. 사실 이격문은 그내용이 감동적이어서 경상도 일원에서 의병들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흩어진 군사들과 백성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후 시일이 지남에 따라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가 시작하였다. 먼저 의령에서 곽재우가 격문이 나가기 전인 4월22일 거병하였고, 단성의 권세춘, 거창의 김면, 합천의 정인홍 등이, 삼가의 박사겸과 박사제, 초계의 전치원과 이대기, 곽율 등이 거병을 하게되었다. 이 상황에서 김성일은 군령의 확립과 선악부를 비치 관리하면서 의병들의 군율을 잡아나가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체계적을 정립시키고, 수하 장수들을 각 지방에 파견함으로써, 각 지방의 상태를 점검하고 의병들의 항쟁이 지속적이면서 전투력의 증진을 위해 군량과 병량의 조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의병과 관군의 불화를 가운데에서 중재하는 역할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곽재우와 도순찰사 김수와의 불화이다. 그 원인은 곽재우가 임진년 4월 22일 전 재산을 기울여 의병을 일으켰다. 그때 초계군수는 김해성 방어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도주하여 돌아오지 않아 군에는 군수가 없고, 아전과 백성들이와 군량을 그냥 가져가는 판이었다. 곽재우 군이 계속 그의 재산만으로 유지될 수 없었고 또한 처음에는 병기도 없었으므로 초계와 신반 창고에 가서 군기와 식량을 싣고 오기도 하고 강가에 방치된 전세미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때 용문산에 숨어 있던 합천군수 전현룡이 도순찰사 김수와 병사 조대곤에게 곽재우를 사나운 큰 도적이라고 보고하였고, 감사와 병사는 곽재우를 잡아죽이려고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렸다. 이에 곽재우의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져 모두 사방으로 흩어질 생각을 함에 곽재우는 장차 모두 다 버리고 두류산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이 때 초유사 김성일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곽재우에게 편지를 보내어 일어나 주기를 권장하였으며, 그 편지에서 “그대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아들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곽재우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구나”하면서, 다시 떨치고 일어나 김성일의 편지를 장대 끝에 내걸어 향리 사람들에게 두루보였다 한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비로소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음을 믿게 되었으며, 감사와 수령들도 감시 저해하지 못함에 군사의 기세가 다시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보여지듯이 의병과 관군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은 알력이 작용했던것 같았다. 힘을 하나로 합쳐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서 그 중재자로써 김성일의 역할이 아주 컷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김성일은 왜군이 전라도를 공략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진주성 방어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그 결과로 임진왜란 삼대대첩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루어내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진주대첩이후 그는 경상도 지역의 잔존 세력을 규합하여 경상우도지역의 수복을 위한 전투에 드러갔고, 그 결과 경상우도의 많은 지역을 수복 할 수 있었다. 이듬 해 1593년 임진왜란 초기에 영남지방의 방어와 점령지에 대한 수복에 지대한 공헌을 한 김성일은 4월 29일 1년동안의 과중한 엄무에 따른 심신 쇄약으로 순국하게 된다.
Ⅵ.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최고의 국난인 임진왜란이란 일대사건을 통해서 당시 영남지방의 상황과 그 시대 사람들이 왜군의 침략에 대처해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우리는 언제나 애국(愛國)·애족(愛族)의 정신을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자신의 일신과 부를 버리고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전쟁터로 단숨에 뛰어 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나 자신도 쉽게 그런 결정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영남의 사람들은 그러하였다. 조선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사회구조적 모순 속에서, 유망의 생활을 하던 백성들을 규합하고 국가의 군사체계가 무너지고 지배계층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도주할 때 영남지역의 아니 조선의 백성들은 괭이대신 죽창을, 유생들은 붓 대신 활과 칼을 잡았던 것이다. 위 글에서는 그러한 사회구조적인 모순과 당시 상황을 살펴보았으며, 임진왜란기의 영남지역 의병항쟁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위 글에서 나열한 인물들 이외에 수많은 조선인들은 왜군의 침략에 맞서싸우며 고귀한 피를 흘렸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평한다. 진정한 의미의 애국·애족은 국가가 위기상황에 처해 있을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현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쉽게 납득되기 힘든 이야기이다. 현대의 사람들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지 보다는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줄지를 먼저 생각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국가가 존속되지 않고서는 그 국가에서 살아가는 국민은 있을 수 없는 존재이다. 임진왜란기의 영남지역 의병항쟁사에서 조금이나마 진정한 의미의 애국·애족정신을 되세 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민족정신 고취와 애국·애족정신의 함양을 위해서 앞으로도 이러한 주제가 더욱더 깊이 연구하여 후세에 길이 남겨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1. 단행본
김명준, 「壬辰倭亂과 金誠一」, 백산서당, 2006
최효식, 「壬辰倭亂기 嶺南義兵硏究」, 국학자료원, 2003
최효식, 「壬亂기 慶尙左道의 義兵抗爭」, 국학자료원, 2004
김강직, 「壬辰倭亂과 慶尙右道의 義兵運動」, 도서출판 혜안, 2001
이장희, 「壬辰倭亂史硏究」, 아세아문화사, 1999
이형석, 「壬辰倭亂史 上, 中, 下, 別」, 한국자치신문사, 1974
변태섭, 「韓國史通論」삼영사, 1986
감성해, 「壬辰倭亂史」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2. 연구논문
정구복,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
김강식, 壬辰倭亂 義兵活動과 性格
정진솔, 壬辰倭亂과 釜山浦 海戰
윤용출, 壬辰倭亂 시기 軍役制의 동요와 개편
이영협, 壬辰倭亂의 經濟史的 意義
3. 참고자료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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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5.25
  • 저작시기20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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