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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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삼국이 통일되기까지의 과정 - 삼국의 정세를 중심으로

1. 삼국 항쟁의 최초 주도권자 고구려
2.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한 나 ․ 제 동맹
3. 고구려와 수의 전쟁
4. 고구려와 당의 전쟁


Ⅲ.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끌어 낸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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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나가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김흠순이 희생양으로 삼은 인물은 자신의 셋째 아들 반굴이었다. 장군 김흠순은 아들에게 희생을 요구했고, 반굴을 서슴없이 백제 진영으로 가서 목숨을 바쳤다. 이를 본 좌장군 품일도 아들 관창에게 희생을 요구했고 그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지배층 희생전략은 결국 황산벌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
신라가 중간급 지휘관들에게만 희생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662년 정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식량이 떨어진 당의 장수 소정방에게 경주에서부터 평양까지 식량을 전달해야 하는,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자청한 인물도 만 67세의 노장 김유신이었다. 그는 왕제 김인문 들과 함께 한겨울에 서라벌에서 평양까지 고구려군과 싸우며 식량을 전달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신라 지배층의 이런 자시 희생이 있었기에 신라군은 국가가 희생을 요구할 때 서슴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신라 지배층은 희생정신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굉장히 철저했다. 나당전쟁 때인 문무왕 12년(672) 당나라 대군과 백수성에서 맞붙었다가 패했을 때 김유신의 아들 원술은 적진에 돌진해 죽으려다가 부하 담릉이 말리는 바람에 죽지 못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내 아들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훈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청했다. 문무왕의 배려로 석방되었으나 원술은 끝내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김유신이 죽었을 때 그가 어머니 뵙기를 청하자 거절했다. 결국 원술은 문무왕 15년(675)의 매초성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싸워 버림받은 한을 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친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 때문에 끝내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살았다고 한다.
6. 낮아진 신분의 벽
고구려는 신분이 낮거나 주류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호동왕자를 죽게 하고 온달을 바보로 만들었다. 특히 연개소문은 능력이 뛰어난 다른 누군가가 아니니,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가 그들의 분열로 나라를 망하게 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자신의 여러 아들에게 백제의 2품 벼슬인 달솔을 한꺼번에 내리는 조치를 시행했다. 반면 능력 있고 총명했던 신하 성충과 윤충은 자시 능력을 제대로 쓰지도 못한고 각각 감옥과 전쟁터에서 세상을 떠났다.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백제 부흥운동이 무너진 것도 왕과 신하가 서로를 질투하면서 내분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라는 달랐던 것이다. 신분제도와 그에 따른 특권은 그 사회가 오래되고 노쇠했을 때 특히 심해진다. 만약 능력 하나로 신분을 뛰어넘는다면 그 사회는 그만큼 역동적이고 새로운 피가 흘러 활기찰 수 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신분을 뛰어넘지 못하고 영원히 진공과 가야제라는 사슬에 묶여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이 그저 그런 인물로 묻히게 되는 것은 물론 신라는 한반도 구석의 작은 나라고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한때 신라를 능가하는 세력을 자랑했던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진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낡을 대로 낡은 신분제도 때문에 실력이 아닌 신분과 혈연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던 것이야말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끝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패망했던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Ⅳ. 나가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사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높다.
먼저,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체제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신라의 통일을 계기로 하나의 체제, 하나의 문화를 누리는 가운데 뚜렷한 국가공동체 또는 민족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통일신라의 지배체제가 붕괴되면서 고구려와 백제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또 한 번의 삼국시대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삼국 모두 통일을 당연한 과제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정복전쟁이 일단락됨으로써 국력이 배가되어 국제사회에서의 국가경쟁력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과거 고구려의 경우에도 중국측의 와조가 부담스럽게 느낄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자랑했고, 또 실제로 수차례의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그 힘을 실증해 보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지리적 조건과 전략, 전술에 의존한 군사 분야에서의 힘에 한정된 것이었다. 신라의 통일 이후에는 평화로움 속에서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가 최소화함으로써 정치 경제가 매우 안정되었으며, 그것은 곧 국제사회에서 신라의 위상을 높이는 기반이 되었다.
셋째, 하나의 국가체제 속에서 국민의 응집력을 기반으로 자랑스러운 문화를 꽃피웠다는 점이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각기 독특한 기술, 문화를 가꾸어온 삼국의 사람들이 하나의 체제 하에서 결속됨으로써 이제 더욱 세련되고 풍요로운 문화를 꽃피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이 통일이 가져다준 평화는 한동안 기술, 문화의 발전을 가속시키고 신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현재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기류가 강하다.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통일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는 만주 대륙이나 일본열도가 아직껏 우리 영토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민족 국가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통일전쟁을 수행한 데 대한 비판도 있다. 그러나 당대성을 무시한 역사 해석은 후대인의 무지이거나 죽은 자에 대한 횡포다. 오히려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어떻게 두 강대국 고구려와 백제를 꺾고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 바람직한 역사 해석 자세일 것이다. 시대가 아무리 달라져도 원리는 같은 법이다. 그런 견지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에게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사건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참고문헌>
김기섭, 『주제별로 풀어쓴 한국 사 강의록 고대편』, 가람기획, 1998.
이덕일, 『교양한국사1』, 휴머니스트, 2006.
역사학자 18인,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 푸른역사, 2000.
이희근, 『한국사는 뜨겁다』, 거름, 2006.
이한, 『다시 발견하는 한국사』, 뜨인돌, 2008.
조성오, 『우리역사 이야기1』, 돌베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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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7.14
  • 저작시기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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