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 일식 중식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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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양식 일식 중식의 개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양식
· 양식 전래 과정
· 손탁호텔
· 청목당
· 화신백화점

2. 일식
· 식민지 시대와 일식 전래 과정
· 아지노모도 전래 과정
· 새로운 군것질거리 등장

3. 중식
· 중식 전래 과정
· 임오군란과 자장면
· 호떡, 당면의 역사

본문내용

체가 잇따라 들어오면서 갗가지 일본과자가 퍼졌다.
- 단팥소를 넣은 일본 과자를 왜떡이라 했다. 팥소를 넣은 모찌(찹살떡)는 흰색과 분홍색으로 유리덮은 상자에 담아 놓았다. 일본 과자 행상은 네모진 유리 상자에 생과자와 모찌를 담아 다니면서 팔았다.
-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만들어 먹는 화채·식혜·수정과와는 달리 공장에서 만든 사이다나 천연탄산수 따위도 나왔다. 상점에는 캬라멜·비스켓·건빵·양과자·양갱·셈베이 등이 진열되면서 보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 캬라멜은 ‘소풍 갈 때 먹는 것’, ‘건강의 비결’이라는 광고로 사람들에게 널리 아려지게 되었다.
- 건빵은 군에서 식량 대용으로 먹던 것이었다. 전시체제이던 1930년대 말에 ‘국민의 휴대식’이라는 광고와 함께 시중에 건빵이 나돌기 시작했다.
- ‘목으로 넘기지 않는 특별한 과자’인 껌은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광고로 ‘사용법’을 설명해야 할 만큼 신기한 먹을 거리였다.
- 초콜릿은 가장 ‘모던한 과자’로 소개되면서 ‘사랑을 낚는 미끼’로 쓰였다.
3. 중식
· 중식 전래 과정
- 중국 음식점이 일본 음식점보다 먼저 생겼다.
- 1882년 임오군란 때 중국 군인들과 함께 중국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중국 음식점도 따라 들어왔다.
-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면서 1899년 무렵 화교가 자장면을 기본으로 한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 중국 음식점은 중국사람이 많이 사는 서울 북창동 일대를 비롯해서 인천과 평양 같은 곳에 많이 들어섰다. 일제 말기 조선에 사는 화교가 6만 5천 명이었고, 중국 음식점은 300개 남짓했다.
· 임오군란과 자장면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 명성황후 측에서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곧 3천여 명의 군대를 파견했고, 이때 군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40여 명의 중국 상인들이 함께 들어왔다. 이들이 바로 한국 화교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듬해인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경의선 철도공사 등으로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들어왔다. 당시 조선에 온 중국인 노동자의 대부분은 산둥 지방 출신이었다. 이들은 야식으로 중국 면장(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곤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자장면의 효시다. 산둥 지방은 면장 등의 장류가 발달한 지역이다.
면장은 밀가루와 콩을 발효시켜 만드는데, 원래는 갈색이었다. 중국인들은 짠맛의 면장을 많이 넣지 않아, 초기의 자장면은 거의 하얀색에 가까웠다. 이 면장을 한 1년 정도 숙성시켜야 검은색으로 변한다. 우리가 말하는 춘장은 6.25전쟁 이후 면장을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면서 생긴 말이다. 숙성된 면장처럼 검은색을 내기 위해 춘장에 캐러멜을 넣었고, 검고 단맛이 나는 춘장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았다. 6.25 이후 중국인이 줄어들어 한국인을 위주로 한 자장면 판매가 서서히 이루어진 것도 한 원인이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기름과 향신료가 줄어든 대신 양파를 듬뿍 넣어 단맛을 강화했다. 또 고기가 들어가고 감자나 당근 등의 야채가 가미된 한국식 자장면으로 바뀌었다.
한편 정식으로 자장면이란 이름으로 음식을 팔기 시작한 곳은 공화춘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 중턱에 위치한 공화춘은 1905년 문을 열었다. 1883년 청나라는 이 일대 5천여 평에 청국 조계지를 설정했으며, 자연스럽게 음식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호떡, 당면의 역사
호떡
호떡은 밀가루 반죽에 설탕을 넣어 기름에 부치는 음식이다. 이것은 한국에 살던 중국 사람들이 자장면처럼 생계를 위해 만들어서 팔던 음식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가 조선에 육군 3,000여명을 파견, 이때 청나라 상인 40명도 같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후 청나라가 망하고 한국에 남아있던 상인들이 생계를 위해 만두와 호떡 같은 음식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호떡이라고 했을까?
호란 중국을 뜻하는 말로중국에서 온 밀을 호밀(胡밀)이라고 했고, 중국의 군인을 호병(胡兵 : 박씨전, 임경업전 등)이라고 했다. 즉, 호떡이란 '중국인이 만든 떡' 또는 '중국의 떡'이란 의미이다.
단, 호빵이란 낱말은 중국과 관계 없다.
'따끈따끈하므로 호호 불면서 먹는 빵'이란 뜻으로 1970년대 초 모 제과회사에서 만든 브랜드 이름이다.
당면
당면은 '호면'이라고도 부르며 마른국수의 일종으로 중국이 그 원산지이다. 우리가 먹는 잡채는 원래 야채만을 넣어 만들어 먹었지만, 1930년대부터 중국에서 들어온 당면을 이용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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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10.11
  • 저작시기20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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