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성 암브로스(St. Ambrose)와 성 크리소스톰(St. John Chrysostom)의 지도력 비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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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기독교]성 암브로스(St. Ambrose)와 성 크리소스톰(St. John Chrysostom)의 지도력 비교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공통점
1) 성화추구의 지도력
2) 경제적 성화 추구의 지도력

2. 차이점
1) 예언자적 행정가
2) 예언자적 설교가

본문내용

게 되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와의 두 번째 대립은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폭동의 보복으로 황제가 군중들을 학살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암브로스는 황제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회개의 증거로 공적인 고해(public penance)를 요구하였고, 파문의 경고 앞에서 황제는 다시 한 번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황제에게 성전의 문을 가로막고 “그 자리에 멈춰라. 양 손에 불의 피가 가득한 자, 죄로 더럽혀진 너 같은 인간은 회개하기 전에는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 거룩한 성소에 들어올 수 없다”고 외쳤다. 이 두 사건으로 황제도 감독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전통을 서방교회에서 정립하면서, 중세의 교황들이 세속 권세 위에 군림하는 부정적 모습으로 발전하여 가기도 하였지만 세속권세가 종교의 영역에서는 교회와 감독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전통을 만들기도 하였다. 암브로스는 황제도 굴복케 하는 예언자적 행정가임에는 분명하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너무나 세속 권력에 어용화되어 가는 것을 볼 때 암브로스적 용기를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대통령이나 정치지도자들에게 바른 백성의 소리를 대변하고, 하나님의 정의가 정치 속에 실현되도록 행정적인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지도자가 한국교회에 필요하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에 입각하여 종교문제에 대하여 간섭하는 정치 세력도 항거할 수 있어야 하고, 문화변혁자(transformer of culture)로 건전한 기독교문화가 정치와 사회 속에 실현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는 지도자들이 천주교회의 김수환 추기경처럼 개신교에서도 많이 나와야 한다.
2) 예언자적 설교가
크리소스톰은 381년 안디옥에서 멜레티우스로부터 부제(subdeacon)로 임명을 받았고, 386년 플라비안 감독(Flavian)으로부터 사제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곧 뛰어난 설교가로서 동방교회 전체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의 이름의 희랍어 의미가 황금의 입(golden mouth)인데, 그 이름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는 교회사 최대의 설교가로 부상하게 된다.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Patriarch)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죽자 크리소스톰은 그의 후임으로 피택되었는데, 그가 수락할 뜻을 보이지 않자 아카디우스(Arcadius) 황제는 그에게 소환령을 내렸고,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 데오빌루스(Theophilus)가 파견된 끝에 결국 398년 2월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크리소스톰은 강제로 마차에 태워져 콘스탄티노플에 실려 와서 대주교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타락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을 개혁시키려는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비현실적이었다. 금욕주의적이고 엄격한 윤리를 주장하였고, 강단에서 흥분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예언자적 능력과 재능이 있었다. 401년 에배소 회의에서 성직매매(simony)를 행한 여섯 명의 감독을 면직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상류사회 부인들의 사치를 공격함으로써 그들과도 대립하게 되었고, 황후 유독시아(Eudoxia)의 사치와 부패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403년 오크노회(The Synod of the Oak)에서 황후 유독시아는 크리소스톰을 비두니아로 유배 가도록 결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배를 떠나던 날 지진이 일어나자 당황한 유독시아는 유배를 철회하였다. 유독시아를 은으로 만든 동상을 헌정하는 기념식이 성 소피아 성당(Santa Sophia) 옆에서 열린 것을 크리소스톰은 유독시아를 앞에 두고 강하게 성령의 새술에 취한 듯이 비판하는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황후 유독시아를 헤로디아에 비유하였다: “또다시 헤로디아가 소리쳤습니다. 또다시 그녀가 난리를 쳤습니다. 또다시 그녀가 춤을 추었습니다. 또다시 그녀가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목을 쟁반에 담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만일 자신을 톱으로 켜서 죽이려하면 이사야를 생각할 것이고, 돌로 쳐서 죽이려하면 스데반을 생각할 것이며, 사자 굴에 던져 넣으면 다니엘을 생각할 것이고, 풀무불에 던져 넣으면 다니엘의 세 친구를 생각할 것이며, 고래 뱃속으로 던지면 요나를 생각할 것이라고 하였다. 순교의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설교를 하였던 것이다. 이 설교로 황제는 그에게 직무정지 처분을 내리게 되었고, 교회의 모든 예식을 집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불복한 크리소스톰이 404년 부활절 세례예식을 집행하려고 교회에 들어왔을 때 무력에 의해 예식이 중단되었고, 그는 아르메니아의 쿠크서스(Cucusus)지방으로 망명가게 되었다. 안디옥 교인들이 그를 존경한 나머지 그를 환송하기 위한 순례행렬을 만들었고, 안디옥 교회가 아르메니아 교회로 이주해 가는 현상이 생기기도 하였다. 동방교회에서는 황제에게 복종하고 아부하여 황제를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환경이었기에, 황제와 황후에게 도전하는 크리소스톰은 당연히 권력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크리소스톰은 방대한 설교주석을 저술한 학자로도 유명하지만, 그의 예언자적 설교가로서의 삶으로도 유명한 지도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한국교회에는 이러한 예언자적 설교가가 너무나 드물다. 한국교회의 설교가들은 제사장적 치유의 설교를 통하여 대형교회를 만든 조용기, 김선도, 곽선희 같은 설교가들은 나왔으나, 크리소스톰 같은 설교가들은 나오지 못하였다. 강원용, 문익환, 김재준 같은 예언자적 설교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좀더 목회자적이면서도 예언자적인 설교가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김정준 같은 설교가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정준의 설교들은 상당히 목회자적이면서도 예언자적인 분위기를 풍겨 주고 있다.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에 서서 바른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가 들이 한국교회에도 많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암브로스나 크리소스톰은 성화를 개인적내면적인격적 차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그들의 예언자적 재능과 은사와 기질을 통하여 구체적인 사회현실 속에서도 사회적 성화와 성결을 실현케 하도록 노력한 위대한 지도자들이라고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성결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도자들이 한국교회에 절실히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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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10.18
  • 저작시기201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42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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