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회복지발달과정에서의 조선시대 구제사업에 대해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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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나라 사회복지발달과정에서의 조선시대 구제사업에 대해 서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면에 사창을 설치, 근실하고 부유한 자를 백성으로 하여금 추천하게 하여 사창을 관장케 하고, 관의 관여 없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도록 하며 이식은 1할씩으로 하여 대전납(代錢納)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권(失權)하자 사창법 역시 유명무실해졌다.
5. 구제기관
1) 혜민국 (惠民局)
고려시대 서민의 질병 치료를 위하여 설치한 의료기관. 1112년(예종 7)에 설치하여 충선왕 때에는 사의서(司醫署)에 예속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관원으로는 판관(判官) 4명을 두었으며, 본업(本業:醫官)과 산직(散職)을 교대로 보내어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혜민서(惠民署)로 고쳤다.
2) 대비원 (大悲院)
고려·조선시대의 구료기관(救療機關). 1049년(고려 문종 3) 개경(開京:開城)의 동·서 두 곳에 설치했던 의료 구제기관으로, 의술을 맡아보는 관리가 있어서 병자(病者)·굶주린 자·행려자(行族者)들을 치료해 주며 음식과 의복 등을 주어 구제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건국 초부터 도성(都城:서울)의 일반 병자를 구활(救活)하기 위하여 시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서소문(東西小門) 밖에 대비원을 특설하고, 병의 유행이 심할 때에는 대비원 주위에 병막(病幕)을 따로 만들어 환자들을 수용, 약과 음식을 주어 치료와 구호를 겸하였다. 대비원은 태종 때에는 활인원(活人院), 세조(世祖) 때에는 활인서(活人署)로 불리다가 1882년(고종 19) 폐지되었다. 그 뒤 활인서의 사업은 후의 혜민서(惠民署)의 업무와 통합되어 제중원(濟衆院)·대한적십자병원으로 이어졌다.
3) 제생원 (濟生院)
조선시대 서민 의료기관. 1397년(태조 6)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설치한 구료(救療) 기관으로, 서울과 지방 빈민의 치료와 서울에서 발생한 미아(迷兒)의 보호도 맡아보았다. 서울에서는 특히 동활인서(東活人署)에 수용된 빈한한 환자의 치료를 맡았으며, 창고궁사(倉庫宮司)의 동녀(童女) 수십 명을 뽑아 맥경(脈經)·침구법(鍼灸法)을 가르쳐 부인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녀(醫女)로 양성하는 한편 각 도 향약재(鄕藥材)의 수납(輸納)·비치 등의 일도 맡아보았다. 관원으로는 설치 당시에 지사(知事)·영(令)·승(丞)·주부(注簿)·녹사(錄事) 등을 두었다가, 1414년(태종 14) 지사·승·부승(副丞)·녹사·부녹사(副錄事)를 두었는데, 59년(세조 5) 혜민서(惠民署)에 병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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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10.27
  • 저작시기2014.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4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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