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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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묘호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호란 전의 정세
1) 후금의 흥기와 조선의 대응
2) 조선과 후금의 교섭
3) 숭명정책과 중립양단외교
2. 정묘호란의 발발
1) 정묘호란의 발발배경
2) 정묘호란의 경과
3) 후금과의 강화시도
4) 강화성립
3. 의병의 활약
4. 정유재란으로 얻은 결과
1) 조선이 얻은 결과
2) 후금이 얻은 것
5. 인조를 위한 변명

본문내용

체결한 뒤에도 후금은 조선을 명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 명과 대등하게 맞서려고 시도했던 후금의 의도와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명과 대등하게 맞서려는 후금의 의지는 청태종이 조선왕제인 원창군을 접견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청태종는 원창군에게 衣를 선물로 주었는데, 이에 원창군은 망의는 국왕이 입는 옷이므로 고사한 적이 있다. 그것은 청태종이 정묘호란때부터 인조를 자신의 제후, 조선을 제후국으로 여겼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 대한 후금의 이같은 잠재된 규정과 인식은 상황이 변화되면 언제든지 다시 표면으로 등장하여 갈등과 파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함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교역선 확보와 그 의미
후금은 호란을 통해 얻은 사회경제적 이익도 상당했다. 우선 조선군이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못한 채 물러나면서 후금군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상당히 많은 포로와 가축 등을 획득할 수 있었다.
후금은 약탈을 통해 인축과 재물을 획득했던 것 이외에도 조선과 교역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했다. 명과의 전쟁상태가 지속되어 교역이 끊긴 상황에서 조선은 후금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다. 후금이 정묘호란 당시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마무리한 것은 조선과의 개시를 염두해 둔 것이기도 했다. 또한 후금은 생필품과 명과의 교역이 단절되어 얻을 수 없는 중국산 물자 등을 조선이 교역해 주기를 원했다. 그 밖에도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후추, 단검 등도 구입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각종 서적이나 경전들도 요구하기도 하였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국가체제를 정비하는데 몰두했다. 국가체제를 정비하는데 있어 조선은 중국과 일본물자를 후금에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조선과의 교역은 후금이 주변의 몽골세력을 초무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과의 교역에서 얻은 물자들은 몽골과의 교역밑천이나 그들을 초무하는데 필요한 선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물품을 몽고에게 주고 전마 등을 구입하는데 사용함으로써, 조선과의 교역이 군사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것이었던 셈이다.
5. 인조를 위한 변명
조선은 조청전쟁을 통해 결과적으로 국왕의 출성항복 등 치욕을 당하고 만다. 이에 관련해서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한 정책을 높이 평가하고, 인조반정 후 중립정책을 펴지 못한 조선조정을 책망하면서 이를 가장 큰 원인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광해군과 인조대의 국제정세가 질적으로 전혀 달랐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광해군대에는 조선이 후금과 결정적으로 대립할 일이 없었다. 1616년 광해군은 명나라의 파병요구에 따라 강홍립을 파견하여 후금과 싸우게 하였는데, 이 때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쓸데없이 명나라 장수의 말을 따르려 하지 말고 스스로 패하지 않을 것에 있으라”고 당부하였고, 강홍립은 그 바탕 위에서 후금과 대립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과 후금의 관계에서 더 중요한 사실은 조선이 명군에 원병을 보내 후금과 싸우게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심하에서 조선군은 후금군대와 접전을 벌여 수많은 적군을 사살하였다. 강홍립이 항복한 것은 함께 출동한 명군이 섬멸되고 조선군도 양날개가 이미 무너진 상태에서 후금군에 포위되고, 식량마저 모두 떨어져서 막다른 골목에 놓인 때였다. 광해군이 유화정책을 펴서 후금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후금에 대한 정탐활동과 주도면밀한 국방대책 등을 통해 빈틈을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의 정책은 어디까지나 후금을 제어하려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시기의 집권세력들은 인조대 정치가들 못지 않은 명분론자들이었다. 광해군대에 후금이 조선을 적대시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세력이 전면적인 대립으로 들어갈 단계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였지만, 1623년 인조대에 이르러서는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해서 전쟁을 피하느냐, 아니면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해야하나’ 라는 극단적인 결단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제2차전쟁이 일어날때만 하더라도 천하의 중심은 여전히 명이었고, 청은 여전히 명의 변방에 자리잡은 하나의 오랑캐세력이었다. 제2차전쟁이 일어나던 시점에서는 청이 명을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사고로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제2차전쟁이 일어날 때, 사실 조선조정이 융통성 있게 정책을 취할 여지는 별로 없었다. 광해군을 포함한 17세기 조선의 집권층이 사회를 운용하던 명분론을 논외로 하더라도, 청이 명을 누르고 장차 중원을 장악하리라는 것을 전쟁 당시에 쉽게 예상할 만한 근거는 별로 없었다. 방어태세의 미흡이 지적되지만, 국방력의 증강은 곧바로 민생의 부담을 뜻하기도 하므로, 그것 역시 쉽게 단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위와 같은 객관적 사실을 염두해 둔다고 해도, 조청전쟁에 대응한 인조와 정부구성원들의 문제점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아무리 객관적 근거가 없었다고 해도 청을 대신하여 중원을 차지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당시 집권층의 씻을 수 없는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종묘사직과 민생 앞에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상황을 전체적으로 고려할 때, 제2차전쟁에 즈음하여 조선이 취할 수 있었던 정책은 청에 대해 불필요한 자극을 피하면서, 끝내 그들이 복속을 강요할 경우 침략을 막아낼 힘과 태세를 갖추는 것이었다. 첫 번째 과정에 대해서는 아쉬운 대로나마 노력을 했지만, 두 번째 과정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할 형편이 못된다. 전쟁을 대비해야 했던 당시 집권층의 자세와 역량에서는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한명기, 2009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 김종원, 1995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3. , 1999 『근세동아시아관계사연구』
4. 국방군사연구소, 1996 『한민족전쟁통사』
5. 오수창, 2006 「오해 속 병자호란, 시대적 한계 앞의 인조」 『내일을 여는 역사』26,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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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1.11
  • 저작시기2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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