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없음
본문내용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도피할 수밖에 없는 개인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는 그것을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인용되는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곡 마지막 악장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하나? 그렇게 할 수밖에! 그렇게 할 수밖에!’ 적어도 정치적인 의미에서 이 말은 구조 속에 존재하는 개인의 무기력함을 드러낸다. 체념의 삶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그렇게 할 수밖에’ 속에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속에서 저항하지 못하고 그 테두리를 떠날 수밖에 없음을 항변해주는 잠언과도 같다.
‘가벼움’에 ‘그렇게 할 수밖에’라고 말하는 그들은 그래서 불안하다. 토마스와 테레사는 그 ‘참을 수 없는’ 현실의 가벼움 때문에 계속 떠나야 했고 또 떠밀려야 했으며 그것은 그 둘의 관계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어 버렸다. 토마스는 오이디푸스에 관한 신문 기고문 때문에 프라하로 다시 돌아와 ‘유리닦이’로 지내면서 누군가의 감시에 시달려야 했고, 삶의 중심에서 겉돌아야 했으며 그러한 불안정한 상황은 테레사와의 관계 속에 끊임없이 투영되었다. 테레사의 ‘무거움’을 인정하기에는 토마스의 자신의 상황이 그리고 존재가 너무나도 ‘가벼웠으며’ 그는 그 가벼움을 끊임없이 他者와의 ‘가벼운’ 관계로 대치하려고 했다. 정치적 불안정성, 존재로 하여금 끊임없이 가벼워지라고 강요하는 상황, 너무도 가벼워 회피할 수밖에 없는 배경들은 개인의 존재를 위협하고 인간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든다.
⑤키취라는 또 하나의 가벼움
토론에서는 그 가벼움을 공산주의로 한정하지 않았다. 넓게 보아 소설 속의 가벼움은 체코가 맞이한 정치적 상황, 즉 소련 공산주의와 그의 지배아래 놓여있는 체코정치에 한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쿤데라가 말하는 내밀한 언어 속에서 가벼움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위, 항상 옳은 듯 서있는 역사, 그리고 행진하길 강요하는 현대에 대한 거부로 확장된다. 그에 대한 해결은 ‘회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적극적으로 배반하고 나아가 무시하듯 ‘조롱’하는 것에까지 이른다. 그러한 가벼움을 쿤데라는 ‘키취’라는 말속에 담아내고 있다.
6부의 7챕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사비나에게 있어서 공산주의에 대한 첫 번째 내면적 거부는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미학적 성질의 것이었다’ 이는 ‘공산주의 자체가 가지는 흉한 모습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에 쓴 아름다움의 가면, 즉 공산주의적인 키취 때문이다’ 사비나는 대표적인 ‘공산주의적 키취’로 노동절에 행해지는 ‘51’행진을 들고 있다. 사비나는 공산주의의 반대쪽 극단에 서있는 미국에서도 키취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키취는 모든 정치가, 모든 정당, 모든 정치운동의 미학적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우리는 더 많은 사례들을 소설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소설 속의 인물들은 권위, 동조, 행진, 역사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키취를 그 무엇보다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느낀 것이 아닐까? 결국 그러한 키취는 공산주의라는 물질성처럼 구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키취적인’ 것이 개인을 지배할 때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해했으며 저항하려고 했다. 그 대표적인 소설 속 인물이 사비나이다.
이 소설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인 ‘이해되지 아니한 단어들’에서 사비나는 자신을 매혹시킨 것은 ‘충실’이 아니라 ‘배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충실은 청교도적이었던 아버지를 연상시키고,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정형화된 그림을 의미하며, 통일성으로 존재하는 역사이다. 또한 그것은 키취적 공산주의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그녀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고 그에 대항해 그녀가 선택하는 것은 ‘배반’이고 그에 대한 ‘조롱’이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배반의 삶’이다. 이러한 그녀의 배반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는 프란츠의 경우처럼 ‘이해되지 못한’관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행진의 경우도 아이러니 하다. 프란츠가 ‘대장정’을 선택할 때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은 사비나가 그러한 자신의 행진을 자랑스러워하고 지지해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것은 그를 캄보디아로 가게 만든 동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해되지 아니한 단어들’편의 ‘행진’챕터에서 보듯이 행진은 그녀가 배반하고자 했던 것이었고 그것은 조롱의 대상인 ‘키취’에 불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비나는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과 모든 침입이 오직 하나의 보다 근본적인 그리고 보다 보편적인 화(禍)를 숨기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모든 종류의 행진을 싫어했다. 반면에 프란츠는 자신의 짜여진 삶에서 뛰쳐나갈 수 있는 것으로 ‘행진’을 선택한다. 그래서 ‘혁명에서 혁명으로, 싸움에서 싸움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행진’속에서 현실적인 삶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은 꿈이 아닌 생생한 존재였다. 둘 다 현재 자신 앞에 놓인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하나는 배반을 다른 하나는 충실을 선택했지만 그들이 행한 ‘정치적 행동’은 오해를 낳고 결국에는 관계의 왜곡과 비극을 낳았다. 서로 이해되지 못한 채로 말이다.
⑥가벼움에 대해 ‘무겁게’ 대응하기
다양한 주제로 행해진 토론을 통해서 우리는 소설 속의 정치적 상황의 의미와 그로 인한 개인의 존재와 관계를 살펴보고자 했다. 우리의 이야기가 인물을 얼마나 정확히 판단했는지, 그리고 쿤데라가 풀어놓은 정치적 상황과 얼마나 일치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모두 그들 앞에 놓여진 삶을 때로는 회피하거나 아니면 배반하거나 프란츠처럼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살아냈다는 것이다. 즉 그들 모두는 그 가벼움을 ‘가벼운지 몰랐으니 잘못이 없다’ 항변하며 가벼움으로 대응한 것이 아니라 ‘가벼움’을 자신의 존재 속에서 ‘무겁게’ 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쿤데라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을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무겁게’ 느낄 것을 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토론이라는 것이 답이 없는 것이나 그 속에서 열매를 얻었으면 합니다.
꽤 긴 글인데 모두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벼움’에 ‘그렇게 할 수밖에’라고 말하는 그들은 그래서 불안하다. 토마스와 테레사는 그 ‘참을 수 없는’ 현실의 가벼움 때문에 계속 떠나야 했고 또 떠밀려야 했으며 그것은 그 둘의 관계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어 버렸다. 토마스는 오이디푸스에 관한 신문 기고문 때문에 프라하로 다시 돌아와 ‘유리닦이’로 지내면서 누군가의 감시에 시달려야 했고, 삶의 중심에서 겉돌아야 했으며 그러한 불안정한 상황은 테레사와의 관계 속에 끊임없이 투영되었다. 테레사의 ‘무거움’을 인정하기에는 토마스의 자신의 상황이 그리고 존재가 너무나도 ‘가벼웠으며’ 그는 그 가벼움을 끊임없이 他者와의 ‘가벼운’ 관계로 대치하려고 했다. 정치적 불안정성, 존재로 하여금 끊임없이 가벼워지라고 강요하는 상황, 너무도 가벼워 회피할 수밖에 없는 배경들은 개인의 존재를 위협하고 인간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든다.
⑤키취라는 또 하나의 가벼움
토론에서는 그 가벼움을 공산주의로 한정하지 않았다. 넓게 보아 소설 속의 가벼움은 체코가 맞이한 정치적 상황, 즉 소련 공산주의와 그의 지배아래 놓여있는 체코정치에 한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쿤데라가 말하는 내밀한 언어 속에서 가벼움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위, 항상 옳은 듯 서있는 역사, 그리고 행진하길 강요하는 현대에 대한 거부로 확장된다. 그에 대한 해결은 ‘회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적극적으로 배반하고 나아가 무시하듯 ‘조롱’하는 것에까지 이른다. 그러한 가벼움을 쿤데라는 ‘키취’라는 말속에 담아내고 있다.
6부의 7챕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사비나에게 있어서 공산주의에 대한 첫 번째 내면적 거부는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미학적 성질의 것이었다’ 이는 ‘공산주의 자체가 가지는 흉한 모습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에 쓴 아름다움의 가면, 즉 공산주의적인 키취 때문이다’ 사비나는 대표적인 ‘공산주의적 키취’로 노동절에 행해지는 ‘51’행진을 들고 있다. 사비나는 공산주의의 반대쪽 극단에 서있는 미국에서도 키취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키취는 모든 정치가, 모든 정당, 모든 정치운동의 미학적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우리는 더 많은 사례들을 소설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소설 속의 인물들은 권위, 동조, 행진, 역사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키취를 그 무엇보다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느낀 것이 아닐까? 결국 그러한 키취는 공산주의라는 물질성처럼 구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키취적인’ 것이 개인을 지배할 때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해했으며 저항하려고 했다. 그 대표적인 소설 속 인물이 사비나이다.
이 소설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인 ‘이해되지 아니한 단어들’에서 사비나는 자신을 매혹시킨 것은 ‘충실’이 아니라 ‘배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충실은 청교도적이었던 아버지를 연상시키고,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정형화된 그림을 의미하며, 통일성으로 존재하는 역사이다. 또한 그것은 키취적 공산주의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그녀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고 그에 대항해 그녀가 선택하는 것은 ‘배반’이고 그에 대한 ‘조롱’이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배반의 삶’이다. 이러한 그녀의 배반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는 프란츠의 경우처럼 ‘이해되지 못한’관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행진의 경우도 아이러니 하다. 프란츠가 ‘대장정’을 선택할 때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은 사비나가 그러한 자신의 행진을 자랑스러워하고 지지해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것은 그를 캄보디아로 가게 만든 동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해되지 아니한 단어들’편의 ‘행진’챕터에서 보듯이 행진은 그녀가 배반하고자 했던 것이었고 그것은 조롱의 대상인 ‘키취’에 불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비나는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과 모든 침입이 오직 하나의 보다 근본적인 그리고 보다 보편적인 화(禍)를 숨기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모든 종류의 행진을 싫어했다. 반면에 프란츠는 자신의 짜여진 삶에서 뛰쳐나갈 수 있는 것으로 ‘행진’을 선택한다. 그래서 ‘혁명에서 혁명으로, 싸움에서 싸움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행진’속에서 현실적인 삶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은 꿈이 아닌 생생한 존재였다. 둘 다 현재 자신 앞에 놓인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하나는 배반을 다른 하나는 충실을 선택했지만 그들이 행한 ‘정치적 행동’은 오해를 낳고 결국에는 관계의 왜곡과 비극을 낳았다. 서로 이해되지 못한 채로 말이다.
⑥가벼움에 대해 ‘무겁게’ 대응하기
다양한 주제로 행해진 토론을 통해서 우리는 소설 속의 정치적 상황의 의미와 그로 인한 개인의 존재와 관계를 살펴보고자 했다. 우리의 이야기가 인물을 얼마나 정확히 판단했는지, 그리고 쿤데라가 풀어놓은 정치적 상황과 얼마나 일치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모두 그들 앞에 놓여진 삶을 때로는 회피하거나 아니면 배반하거나 프란츠처럼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살아냈다는 것이다. 즉 그들 모두는 그 가벼움을 ‘가벼운지 몰랐으니 잘못이 없다’ 항변하며 가벼움으로 대응한 것이 아니라 ‘가벼움’을 자신의 존재 속에서 ‘무겁게’ 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쿤데라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을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무겁게’ 느낄 것을 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토론이라는 것이 답이 없는 것이나 그 속에서 열매를 얻었으면 합니다.
꽤 긴 글인데 모두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