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대몽항쟁과 최씨정권의 붕괴
1) 대몽항쟁 2) 최씨정권의 붕괴와 강화론의 성장
3. 김준・임연 정권의 성립과 붕괴
1) 김준・임연 시기의 정치운영
2) 김준・임연 시기의 대몽관계 - 국왕폐위와 관련하여
4. 무신정권 몰락후의 무반
1) 무신정권의 해체
2) 몽고 압박기의 무반
3) 武班官職의 성격의 변질 5. 맺음말
2. 대몽항쟁과 최씨정권의 붕괴
1) 대몽항쟁 2) 최씨정권의 붕괴와 강화론의 성장
3. 김준・임연 정권의 성립과 붕괴
1) 김준・임연 시기의 정치운영
2) 김준・임연 시기의 대몽관계 - 국왕폐위와 관련하여
4. 무신정권 몰락후의 무반
1) 무신정권의 해체
2) 몽고 압박기의 무반
3) 武班官職의 성격의 변질 5. 맺음말
본문내용
의 관계에 있었다. 몽고의 압력이 무인정권을 몰락시키고 또 무인 적 기반인 삼별초를 해체케 하였지만 또한 그와 동시에 무반의 세력을 증대 되었던 것이다. 즉 몽고가 고려를 굴복시킨 후, 삼별초군의 토벌과 이차 일본정벌이 계속함으로써 고려의 무인이 활약하고 대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뿐 아니라, 실로 몽고 자체가 무적성격을 가진 제국이었기에 때문에, 자연히 고려의 대몽관계는 무인 중심으로 행하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고는 무력을 통하여 세계적 제국을 형성하고 고려에 대하여도 군사적 압력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고와 고려의 관계는 武的인 관계였으며 여기에 고려무인의 활동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몽고세력을 배경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에서 몽고에 파견되는 사행은 대개 무인이 맡았다. 외국에의 譴使는 무신난 전에는 문신에 국한되고, 무신집권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무신도 파견되었는데 이제 원종 11년 이후의 대몽관계에 있어서도 주로 무반이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몽고 사행에 수행하는 고려의 譯者도 대개 무관이었다.
3) 武班官職의 성격의 변질
(1) 무반관직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
무신들이 득세한 무신난 후에도 무반관직에 대한 사회적 개념은 곧 변화되지 않았다. 문반관직을 존숭하고 무반관직을 비하하던 고려의 전통적인 사회 관념은 무신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전통적인 숭문사회에서 弓劍에 종사하는 무인이 숭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인이 집권하게 된 고려 후기에도 문·무양반중 무인의 권세가 컸던 무신 난 후에도 무반관직을 기피하고 문반관직을 택하였다. 고종 때 李續은 거란군 침입 때 공을 세웠으므로「上奇其勇 除左右衛將軍 公固辭不受」『東國李相國集』卷 35, 尹承解墓誌.
이리하여 자우이별군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고사하고 將作監에 개수되고 있다. 문반 출신이 무직에 개수되는 것을 싫어할 뿐 아니라 본래 무반으로 종사하고 있는 자도 될 수 있으면 등제하여 문반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문신재상인 허홍의 자 허관은 낭장 직에 제수되었으나 사년간이나 불사하며 월시하여, 충렬왕조에 등제하여 문반 직으로 진출하였고『東國李相國集』卷 36, 李續墓誌.
, 김방경의 자 金恂도 낭장이었으나 충렬왕 5년에 등제하여 학사직강에 나가게 되었다.『高麗史』卷 104, 김순전.
고려후기 무반의 성분을 보면 노비, 환자, 술사, 악사, 공장, 상매, 역관, 응방 등의 천예출신 등으로 보아 무반의사회신분이 낮았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무신 난 이후에도 무반관직에 대한 사회적 관념이 비하되었던 까닭이며 이에 따라 여전히 문반에 비하여 천시되었던 것이다.
(2) 무반관직의 성격의 변화
무인집권기나 또는 그 후에는 무인들이 정권을 쥐고 권세를 함부로 하며, 또한 재상화 되는 자가 많았으므로 무반 관직에 대한 의미도 점차 변질되어 갔음은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 문신가문 출신들은 무신난전에는 문직만을 대유하고 무직을 가진 경우가 없었는데, 무신난 후에는 무직을 대유함이 보통이었다. 문반가문에서도 무반이 나왔기 때문에 한 가족 안에서도 문관과 무관이 병존하여 문반가문이니 또는 무반가문이니 하는 구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 사람이 換文換武 하여 문무반간을 교통 왕래하는 예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명종 조에 정극온은 무문출신이었으나 「公始籍山東 爲良令同正 召入內侍」이라 하여 문반으로 始仕 하다가 뒤에 전공으로 금오위산원에 개수되어 무반으로 출세하고 있으니『東國李相國集』卷 35, 鄭克溫墓誌.
이것은 무문에서 문반으로 나오고 다시 무반으로 轉한 예라 하겠다.
한 가문에서 문반과 무반이 병존 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한 사람이 문반과 무반 사이를 왕래하고 있어서 문 무반 사이의 관계가 변질되었다. 무신난 후에도 문반과 무반이 병립되어 구별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무신난 전과 같은 극단적인 대립관계가 훨씬 완화된 것이다. 점점 문반이 개방되고 武職이 많은 문반에게도 受與되고 있었다.
5. 맺음말
무신집권기는 12세기 고려의 혼란의 극복이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무신집권기 역시 대내적 역량이 아닌 몽고와의 항쟁과 강화의 과정에서 이루어 졌기에 고려의 자주성이 크게 훼손된 극복이라 할 수 있다. 이시기의 상황은 단순히 최씨집권기의 붕괴가 아닌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를 야기했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 몽고의 영향에 따른 변화였기에 이후 고려는 몽고의 간섭을 받는 원간섭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12세기의 혼란이 극복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유지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몽고와의 항쟁에 있어 최씨정권은 항전을 주장하며 전쟁의 장기화를 유도했지만 이는 결국 집권층의 내분과 민심의 이탈을 야기했다. 이는 결국 최씨집권을 붕괴시킨 요인으로 작용했으나, 몽고와의 강화는 무신정권이라는 한계에서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상 이를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은 당시의 모순적인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이후 벌어진 삼별초의 항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강화론을 주도했던 문신들은 원간섭기 이후로도 정권을 유지함으로써 후에 권문세족이라 불리는 집단의 모태가 되었다. 김준과 임연의 등장은 무신집권세력의 마지막 저항이었으나 이후 다른 모습으로 무신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게 된다. 무신집권기라는 시기는 고려시대에 있어서 일종의 전환기의 역사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박용운, 2008,「고려시대사」,『일지사』
<논문>
변태섭, 1971,「고려정치제도사연구」,『일조각』
강성원, 1995,「원종대의 권력구조와 정국의 변화」,『역사와 현실』17
강재광, 2010,「崔政權의 對蒙和議論 수용과 崔氏政權의 崩壞」,『한국중세사연구』제28호
이익주, 1996,「高麗 對蒙抗爭期 講和論의 硏究」,『歷史學報』151
김대중, 1990,「최씨정권의 무력기반 해체와 몰락」,『경희사학』14
강재광, 2004,「최씨가 가노출신 정치인의 역할과 무오정변의 성격」,『학국사연구』127
최원영, 1995,「임연정권의 성립과 전개」,『고려무인정권연구』
성봉현, 1998,「임연정권에 관한 연구」,『호서사학』16
3) 武班官職의 성격의 변질
(1) 무반관직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
무신들이 득세한 무신난 후에도 무반관직에 대한 사회적 개념은 곧 변화되지 않았다. 문반관직을 존숭하고 무반관직을 비하하던 고려의 전통적인 사회 관념은 무신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전통적인 숭문사회에서 弓劍에 종사하는 무인이 숭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인이 집권하게 된 고려 후기에도 문·무양반중 무인의 권세가 컸던 무신 난 후에도 무반관직을 기피하고 문반관직을 택하였다. 고종 때 李續은 거란군 침입 때 공을 세웠으므로「上奇其勇 除左右衛將軍 公固辭不受」『東國李相國集』卷 35, 尹承解墓誌.
이리하여 자우이별군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고사하고 將作監에 개수되고 있다. 문반 출신이 무직에 개수되는 것을 싫어할 뿐 아니라 본래 무반으로 종사하고 있는 자도 될 수 있으면 등제하여 문반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문신재상인 허홍의 자 허관은 낭장 직에 제수되었으나 사년간이나 불사하며 월시하여, 충렬왕조에 등제하여 문반 직으로 진출하였고『東國李相國集』卷 36, 李續墓誌.
, 김방경의 자 金恂도 낭장이었으나 충렬왕 5년에 등제하여 학사직강에 나가게 되었다.『高麗史』卷 104, 김순전.
고려후기 무반의 성분을 보면 노비, 환자, 술사, 악사, 공장, 상매, 역관, 응방 등의 천예출신 등으로 보아 무반의사회신분이 낮았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무신 난 이후에도 무반관직에 대한 사회적 관념이 비하되었던 까닭이며 이에 따라 여전히 문반에 비하여 천시되었던 것이다.
(2) 무반관직의 성격의 변화
무인집권기나 또는 그 후에는 무인들이 정권을 쥐고 권세를 함부로 하며, 또한 재상화 되는 자가 많았으므로 무반 관직에 대한 의미도 점차 변질되어 갔음은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 문신가문 출신들은 무신난전에는 문직만을 대유하고 무직을 가진 경우가 없었는데, 무신난 후에는 무직을 대유함이 보통이었다. 문반가문에서도 무반이 나왔기 때문에 한 가족 안에서도 문관과 무관이 병존하여 문반가문이니 또는 무반가문이니 하는 구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 사람이 換文換武 하여 문무반간을 교통 왕래하는 예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명종 조에 정극온은 무문출신이었으나 「公始籍山東 爲良令同正 召入內侍」이라 하여 문반으로 始仕 하다가 뒤에 전공으로 금오위산원에 개수되어 무반으로 출세하고 있으니『東國李相國集』卷 35, 鄭克溫墓誌.
이것은 무문에서 문반으로 나오고 다시 무반으로 轉한 예라 하겠다.
한 가문에서 문반과 무반이 병존 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한 사람이 문반과 무반 사이를 왕래하고 있어서 문 무반 사이의 관계가 변질되었다. 무신난 후에도 문반과 무반이 병립되어 구별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무신난 전과 같은 극단적인 대립관계가 훨씬 완화된 것이다. 점점 문반이 개방되고 武職이 많은 문반에게도 受與되고 있었다.
5. 맺음말
무신집권기는 12세기 고려의 혼란의 극복이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무신집권기 역시 대내적 역량이 아닌 몽고와의 항쟁과 강화의 과정에서 이루어 졌기에 고려의 자주성이 크게 훼손된 극복이라 할 수 있다. 이시기의 상황은 단순히 최씨집권기의 붕괴가 아닌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를 야기했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 몽고의 영향에 따른 변화였기에 이후 고려는 몽고의 간섭을 받는 원간섭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12세기의 혼란이 극복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유지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몽고와의 항쟁에 있어 최씨정권은 항전을 주장하며 전쟁의 장기화를 유도했지만 이는 결국 집권층의 내분과 민심의 이탈을 야기했다. 이는 결국 최씨집권을 붕괴시킨 요인으로 작용했으나, 몽고와의 강화는 무신정권이라는 한계에서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상 이를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은 당시의 모순적인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이후 벌어진 삼별초의 항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강화론을 주도했던 문신들은 원간섭기 이후로도 정권을 유지함으로써 후에 권문세족이라 불리는 집단의 모태가 되었다. 김준과 임연의 등장은 무신집권세력의 마지막 저항이었으나 이후 다른 모습으로 무신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게 된다. 무신집권기라는 시기는 고려시대에 있어서 일종의 전환기의 역사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박용운, 2008,「고려시대사」,『일지사』
<논문>
변태섭, 1971,「고려정치제도사연구」,『일조각』
강성원, 1995,「원종대의 권력구조와 정국의 변화」,『역사와 현실』17
강재광, 2010,「崔政權의 對蒙和議論 수용과 崔氏政權의 崩壞」,『한국중세사연구』제28호
이익주, 1996,「高麗 對蒙抗爭期 講和論의 硏究」,『歷史學報』151
김대중, 1990,「최씨정권의 무력기반 해체와 몰락」,『경희사학』14
강재광, 2004,「최씨가 가노출신 정치인의 역할과 무오정변의 성격」,『학국사연구』127
최원영, 1995,「임연정권의 성립과 전개」,『고려무인정권연구』
성봉현, 1998,「임연정권에 관한 연구」,『호서사학』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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