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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사결정을 서울중앙과 조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토지개혁은 임시인민위원회 결성 이후 준비작업이 진행되어오다 마지막 단계에서 북조선농민연맹대회에서 표출된 ‘밑으로부터’의 요구를 토대로 바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통해 ‘위로부터’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토지개혁은 1개월도 채 안 되는 사이에 급속히 완수되어 비교적 평화롭게 종료되었다.
2. 당군관계
로동당 내에 군사관계 전담부서가 없었던 것은 당군관계의 중요한 특징이다. 조선인민군은 처음부터 로동당의 군대라고 할 수는 없다. 군내에 로동당 단체가 조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군은 당세포가 조직되어 있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다. 군은 당의 계통적 통제로부터 면제되어 그 자율성이 최대한 보장되어 있었다. 군대 내에서는 문화부가 당원사업을 담당하고 민족보위성 안에 문화훈련국이 설치되어, 군사지휘체계에 따른 명령계통과 문화부를 통한 명령계통이 병존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단일지휘제’ 하의 문화부사업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조선인민군을 창건할 당시 모델로 한 것은 ‘단일지휘제’로 이행하여 정규화한 소련 군사제도였다.
군에 대한 통제는 김일성을 정점으로 민족보위성을 통해 만주파를 중심으로 거의 자기완결적으로 이루어졌다. 군 창설은 만주파가 주도해 만주파의 대부분이 군에 진출하였고 연안계를 견제하며 그 협력을 얻고 소련계의 실무적 지원을 받았다. 인민군은 당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당과 동시에 성장하였다. 당내에 너무나도 많은 이질적 요소가 혼재해 인민군을 당의 통제에 맡기기 어려웠으며, 이 시기 당은 군을 통제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
만주파의 군 장악과 엄격한 군사단일제 밑에 유지되던 인민군의 통일성에 이질적 요소가 들어왔다. 남한에서 빨치산투쟁을 하여 남로당이 군사화된 이후 1949년 9월 남북로동당이 합당한 것과, 국공내전에 참가한 조선인부대가 인도된 것으로, 이는 당이 군에 더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당의 군에 대한 관계를 더 복잡하게 하기도 했다.
Ⅲ.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의문점
1. 연구 대상과 적절한 거리두기
한반도의 북쪽, ‘북한’의 호칭에 관해 객관적인 입장에서 ‘북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선했다. ‘북조선’을 부르는 여러 명칭의 입장을 나열하며 중립적 의미의 ‘북조선’을 사용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625’라고 부르는 것을 읽으며 가치중립적으로 연구에 임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2. 국가의 강한 힘의 근원
북조선에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보면, 국가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데, 이를 식민지 시대에 조선총독부체제 하에서 시민사회의 발달이 지극히 취약했던 것과, 해방 직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주민들의 자발적 조직도 단기간의 국가 건설 과정에서 급속히 행정조직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저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와 더불어 현재까지 북조선은 사회를 통제하는 국가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이유도 식민지 시대의 연장선으로 근 100년 동안 자유다운 자유가 결여된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토지개혁은 1개월도 채 안 되는 사이에 급속히 완수되어 비교적 평화롭게 종료되었다.
2. 당군관계
로동당 내에 군사관계 전담부서가 없었던 것은 당군관계의 중요한 특징이다. 조선인민군은 처음부터 로동당의 군대라고 할 수는 없다. 군내에 로동당 단체가 조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군은 당세포가 조직되어 있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다. 군은 당의 계통적 통제로부터 면제되어 그 자율성이 최대한 보장되어 있었다. 군대 내에서는 문화부가 당원사업을 담당하고 민족보위성 안에 문화훈련국이 설치되어, 군사지휘체계에 따른 명령계통과 문화부를 통한 명령계통이 병존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단일지휘제’ 하의 문화부사업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조선인민군을 창건할 당시 모델로 한 것은 ‘단일지휘제’로 이행하여 정규화한 소련 군사제도였다.
군에 대한 통제는 김일성을 정점으로 민족보위성을 통해 만주파를 중심으로 거의 자기완결적으로 이루어졌다. 군 창설은 만주파가 주도해 만주파의 대부분이 군에 진출하였고 연안계를 견제하며 그 협력을 얻고 소련계의 실무적 지원을 받았다. 인민군은 당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당과 동시에 성장하였다. 당내에 너무나도 많은 이질적 요소가 혼재해 인민군을 당의 통제에 맡기기 어려웠으며, 이 시기 당은 군을 통제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
만주파의 군 장악과 엄격한 군사단일제 밑에 유지되던 인민군의 통일성에 이질적 요소가 들어왔다. 남한에서 빨치산투쟁을 하여 남로당이 군사화된 이후 1949년 9월 남북로동당이 합당한 것과, 국공내전에 참가한 조선인부대가 인도된 것으로, 이는 당이 군에 더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당의 군에 대한 관계를 더 복잡하게 하기도 했다.
Ⅲ.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의문점
1. 연구 대상과 적절한 거리두기
한반도의 북쪽, ‘북한’의 호칭에 관해 객관적인 입장에서 ‘북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선했다. ‘북조선’을 부르는 여러 명칭의 입장을 나열하며 중립적 의미의 ‘북조선’을 사용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625’라고 부르는 것을 읽으며 가치중립적으로 연구에 임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2. 국가의 강한 힘의 근원
북조선에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보면, 국가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데, 이를 식민지 시대에 조선총독부체제 하에서 시민사회의 발달이 지극히 취약했던 것과, 해방 직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주민들의 자발적 조직도 단기간의 국가 건설 과정에서 급속히 행정조직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저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와 더불어 현재까지 북조선은 사회를 통제하는 국가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이유도 식민지 시대의 연장선으로 근 100년 동안 자유다운 자유가 결여된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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