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숙청이라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김일성의 결론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1957년도의 경제적 성과로서 중공업우선 노선에 이의를 제기한 세력의 오류는 확증되었다는 자신감이었다. 따라서 연안계와 소련계에 대한 숙청은 경제발전노선을 둘러싼 대립을 총정리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연안계 거두인 전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 김두봉, 소련계 부수상 박의완, 국내계 수매양정상 오기섭, 석탄공업상 류축운이 종파분자로서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이 밖에연안게는 국립도서관장 한빈, 민족보위부상 김응도 비난의 도마 위에 올려졌다. 김일성이 강조한 것은 당의 지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서 그의 주장은 수정주의 비판이라는 논리로 전개되었다. 김일성은 “우리나라에서 수정주의가 체게적으로 나온 것은 없지만 우리 당에 반대하는 자들이 소위 『국제사조』에 휩쓸려 수정주의를 퍼뜨렸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북조선에서 수정주는 “당의 령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고 지적하고 김두봉이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가 당보다 높다”고 한 것, 서휘가 “직맹은 당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 것, 인민군총정치국 부국장 김을규가 “인민군대는 당의 군대가 아니고 통일전선의 군대”라고 한 것 등을 대표적으로 거론하며 비난했다. 더욱이 김일성은 사법기관에서는 “적대행위를 한 적지 않은 수감자들을 석방함으로써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였다”고 지적, 이러한 경향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반대하는 수정주의적 경향”이라고 비난했다. 다만 이 시점에서 김일성은 최창익, 김응, 김두봉, 한빈을 비난하면서도 ‘반혁명폭동음모’를 언급하지 않고 김두봉이 ‘반혁명폭동음모’에 참가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pp.773~774.
같은 장 제3절 “사회주의대고조에서 「자력갱생」「국방경제 병진」으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김일성은 1956년 12월 전원회의 이후 거둔 경제적 성과에 근거하여 자신감을 갖고 대화에 임할 수 있었다. 1957년도 경제적 성과로써 중공업우선 노선에 이의를 제기한 세력의 오류는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대표자회는 그동안 추진해 온 연안계와 소련계에 대한 숙청작업을 총괄하는 대회이자 경제발전 노선을 둘러싼 대립을 총괄하는 대회이기도 하였다. 김일성은 “우리 당이 지금까지 견지하여온 방침, 다시 말하여 중공업을 위주로 하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방침을 계속 견지”해야 한다고 하며 “중공업이 없이는 경공업과 농업을 도저히 발전시킬 수 없다”고 말하였다. 당직이 개편되어 김두봉, 박의완이 숙청됨에 따라 당상무위 후보의원인 김창만, 리효순이 당상무위원, 한상두, 하앙천이 새롭게 후보위원이 되었다. 행정부가 신설되어 김경석이 부장이 되고 간부부는 폐지되었다. 숙청된 박훈일의 후임 농업부장에는 평안남도 당위원장 김만금이 임명되었다. 김승화, 리필규, 박의완 숙청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건설부문에 대한 당적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산업부에서 건설운수부가 분리 신설되어 강원도당 위원장 김원봉이 임명되었다. 이미 1957년 9월 당중앙위전원회의 이후 부상하고 있던 김영주를 비롯한 소장 그룹이 숙청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시작하였다.
6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에서 정식으로 통과된 제1차 5개년 계획 법령에 따르면 계획 기간에 중공업 생산은 2.6배, 그중에서 생산수단 생산은 2.9배, 소비재 생산은 2.2배로 성정한다고 예정하고 투자총액에서 공업 비중이 55%이상, 공업투자총액에서 중공업의 비중은 83%이상 차지한다고 예정하였다. 공업 생산액 증가의 63%이상을 새로운 노동력을 투입하지 않고 노동생산능률만 높임으로써 보장하도록 하였다. 김일성의 노선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북조선 경제의 ‘법칙’이 되어 이후 경제발전 과정을 지배하게 되었다.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pp.826~827.
이런 식으로 같은 사건이 다른 주제를 만나면 서술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형식으로 책 내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 시기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이 빈약하였기 때문에 반복해서 같은 내용이 나오고 다양한 서술을 볼 수 있어 좋았지만 나중에는 앞의 내용을 잊게 하고 헷갈리게 만들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사건별로 저자가 각 주제 따라 어떻게 서술하는지 내용을 정리해 보는 것도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일성의 결론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1957년도의 경제적 성과로서 중공업우선 노선에 이의를 제기한 세력의 오류는 확증되었다는 자신감이었다. 따라서 연안계와 소련계에 대한 숙청은 경제발전노선을 둘러싼 대립을 총정리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연안계 거두인 전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 김두봉, 소련계 부수상 박의완, 국내계 수매양정상 오기섭, 석탄공업상 류축운이 종파분자로서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이 밖에연안게는 국립도서관장 한빈, 민족보위부상 김응도 비난의 도마 위에 올려졌다. 김일성이 강조한 것은 당의 지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서 그의 주장은 수정주의 비판이라는 논리로 전개되었다. 김일성은 “우리나라에서 수정주의가 체게적으로 나온 것은 없지만 우리 당에 반대하는 자들이 소위 『국제사조』에 휩쓸려 수정주의를 퍼뜨렸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북조선에서 수정주는 “당의 령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고 지적하고 김두봉이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가 당보다 높다”고 한 것, 서휘가 “직맹은 당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 것, 인민군총정치국 부국장 김을규가 “인민군대는 당의 군대가 아니고 통일전선의 군대”라고 한 것 등을 대표적으로 거론하며 비난했다. 더욱이 김일성은 사법기관에서는 “적대행위를 한 적지 않은 수감자들을 석방함으로써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였다”고 지적, 이러한 경향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반대하는 수정주의적 경향”이라고 비난했다. 다만 이 시점에서 김일성은 최창익, 김응, 김두봉, 한빈을 비난하면서도 ‘반혁명폭동음모’를 언급하지 않고 김두봉이 ‘반혁명폭동음모’에 참가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pp.773~774.
같은 장 제3절 “사회주의대고조에서 「자력갱생」「국방경제 병진」으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김일성은 1956년 12월 전원회의 이후 거둔 경제적 성과에 근거하여 자신감을 갖고 대화에 임할 수 있었다. 1957년도 경제적 성과로써 중공업우선 노선에 이의를 제기한 세력의 오류는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대표자회는 그동안 추진해 온 연안계와 소련계에 대한 숙청작업을 총괄하는 대회이자 경제발전 노선을 둘러싼 대립을 총괄하는 대회이기도 하였다. 김일성은 “우리 당이 지금까지 견지하여온 방침, 다시 말하여 중공업을 위주로 하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방침을 계속 견지”해야 한다고 하며 “중공업이 없이는 경공업과 농업을 도저히 발전시킬 수 없다”고 말하였다. 당직이 개편되어 김두봉, 박의완이 숙청됨에 따라 당상무위 후보의원인 김창만, 리효순이 당상무위원, 한상두, 하앙천이 새롭게 후보위원이 되었다. 행정부가 신설되어 김경석이 부장이 되고 간부부는 폐지되었다. 숙청된 박훈일의 후임 농업부장에는 평안남도 당위원장 김만금이 임명되었다. 김승화, 리필규, 박의완 숙청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건설부문에 대한 당적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산업부에서 건설운수부가 분리 신설되어 강원도당 위원장 김원봉이 임명되었다. 이미 1957년 9월 당중앙위전원회의 이후 부상하고 있던 김영주를 비롯한 소장 그룹이 숙청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시작하였다.
6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 회의에서 정식으로 통과된 제1차 5개년 계획 법령에 따르면 계획 기간에 중공업 생산은 2.6배, 그중에서 생산수단 생산은 2.9배, 소비재 생산은 2.2배로 성정한다고 예정하고 투자총액에서 공업 비중이 55%이상, 공업투자총액에서 중공업의 비중은 83%이상 차지한다고 예정하였다. 공업 생산액 증가의 63%이상을 새로운 노동력을 투입하지 않고 노동생산능률만 높임으로써 보장하도록 하였다. 김일성의 노선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북조선 경제의 ‘법칙’이 되어 이후 경제발전 과정을 지배하게 되었다.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pp.826~827.
이런 식으로 같은 사건이 다른 주제를 만나면 서술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형식으로 책 내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 시기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이 빈약하였기 때문에 반복해서 같은 내용이 나오고 다양한 서술을 볼 수 있어 좋았지만 나중에는 앞의 내용을 잊게 하고 헷갈리게 만들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사건별로 저자가 각 주제 따라 어떻게 서술하는지 내용을 정리해 보는 것도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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