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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존재이해를 찾아가는 방법의 문제
제2장 실존에서의 존재이해 이해하기
제3장 실존적 양심에서의 존재 찾아가기
제2장 실존에서의 존재이해 이해하기
제3장 실존적 양심에서의 존재 찾아가기
본문내용
맹이를 너 의로움·어림이지 아니-이고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 본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뒤로 나자빠질 것이다. 만일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다면 그들도 인간의 눈을 -자기이지 않음에서- 똑바로 쳐다보게 될 것으로 상상해 본다. 그들도 존재의 지평에 열려 슬픈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상상해 본다.
끝.
존재이해란 무엇인가
[부제목: 하이데거 이해하기]
서 론
본인은 치과 군의관 훈련을 받고 전방 사단에 배치되어 여기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낯선 시간을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떤 날 저녁 무렵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시골의 논두렁 길을 가다가 하나의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마치 쌩떽쥐베리가 비행기를 몰고 가다가 사막에 추락하여 어린 왕자를 만난 것과 비슷한 경험이라고 하여야 할 듯하다. 시골 찻집에서 가깝게 지내던 ROTC 소위에게서 이광수의 어떤 소설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용은 어떤 사장이 죽은 친구의 딸을 데려다 길렀는데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그런 소설의 이야기이었다. 그런데 이 소위가 어떤 말을 하느냐면 자기는 이 사장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이 친구의 딸과 결혼을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본인은 놀라서 그건 안 된다고 하였더니 이 소위가 하는 말이 ‘사랑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본인은 그렇게 되면 세상은 온통 불의천지가 될 것이라고 하였더니 소위는 또 한 번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사랑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그와 헤어져 저녁노을을 쳐다보며- 시골 길을 걸으면서 도대체 이 순진한 소위가 틀렸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도대체 옳고 그름은 누가 무엇이 정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던 중“나야”하는 어떤 소리를 마음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놀라서 이“나야”가 누구인지를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차츰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이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철학책들을 읽어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똑같이 이 [존재]를 다른 입장에서-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하이데거였다.
최근 하이데거가 추구하려 했던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다시 공부하여 정리를 하여 보았다. 그가 말하고 싶어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보았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의 존재자들(=존재사물들)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해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가 나오는데 즉 이 존재이해가 어느 존재에 대한 이해이냐의 문제이다. 그런데 전기와 후기의 하이데거가 있는데 전기의 하이데거는“이 존재”가 인간 현존재[나]에서 나온다고 주장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나오는 현장의 그림을 찬란하게 그렸다. 이 존재가 인간 현존재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진화론 비슷하여 얼마나 인기가 있었을 지는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후기(1930년 이후)에 가서 슬며시 이 만들어 진다는- 주장을 중단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어쨌든 존재하고 있는 이 존재가 갖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쪽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젊은 시절 중세의 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의 철학사상에 대해서 특별히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분의 학설이 어느 분야에서 유명하느냐면, 인간에게는 신과 인간에 일의적(一義的)으로 통하는 예지(sapientia) 개념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이론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신을 논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상은 당연히 인간에게는 신과 인간에 두루 통하는 어떤 존재에 대한 존재이해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니 하이데거가 이 존재를 찾아 나선 것은 당연할 듯하다.
그런데 이 찾아나서기가 하이데거만의 관심사일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같이 찾아보자는 것이 본인의 이 씀의 목적이 되겠다.
[하이데거를 연구하는 분들을 위하여 맨 뒤에 둔스 스코투스의 有의 一義性(univocitas entis)에 대해서 정의채 교수 서술 부분을 옮겨 놓았음. (중세철학사 정의채김규영 씀. 지학사, 1985년도판, p.287)]
임 창 선
1941년 서울 회기동 출생
1959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1965년 서울 치과대학교 졸업
1965~1968 강원도 원통, 춘천, 속초에서 군생활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 44-3 레이크팰리스
상가 A동 305 치과 근무중
본 글은 로고스가 무엇이고 어떠한 것인지를 체험적으로 밝혀보려고 노력해 본 글입니다.
본인은 사춘기때 병약함에 시달렸고 또 많은 사람들처럼 철학적 회의에 시달렸었습니다. 치과를 전공한 후 군대에 입대하여서는 전방에 고립되어 소외된 기분 속에서 인간 속에 어떤 제3의 존재가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학생시절에는 하늘의 이끌림에 의해서 종교적인 체험도 조금 갖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인간에서 당위를 결정하는 것, 선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저녁 노을의 들판길을 걷다가 내 속에서 그것은“나야”하는 어떤 조그만 목소리를 마음속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존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추구하고 그 존재의 착함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차츰차츰 밝혀 보는데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 속의 절대 선(善)인 Logos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 절대 선(善)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보고 싶은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로고스가 어떠한 것인지가 이해되어야 인간 속의 존재이해도 가능하게 되고, 인식론의 이해도 가능하게 되며, 해석학과 현상학도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게 되리라고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 로고스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로고스를 직접 만나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떤 극한 상항에 떨어져서 절망하여 자아를 움켜잡고 있던 손을 놓게 되는 상항이 발생해야 되고, 그렇게 되면 저절로 자애의 꺼풀이 벗겨지면서 바로 눈 앞에 -그 동안 떨고 서 있던-“너”가 보여지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여 보려고 애써 본 글입니다.
2015. 7. 1.
- 이상 블로그“임창선의 철학 노트” 중의 일부분입니다 -
끝.
존재이해란 무엇인가
[부제목: 하이데거 이해하기]
서 론
본인은 치과 군의관 훈련을 받고 전방 사단에 배치되어 여기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낯선 시간을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떤 날 저녁 무렵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시골의 논두렁 길을 가다가 하나의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마치 쌩떽쥐베리가 비행기를 몰고 가다가 사막에 추락하여 어린 왕자를 만난 것과 비슷한 경험이라고 하여야 할 듯하다. 시골 찻집에서 가깝게 지내던 ROTC 소위에게서 이광수의 어떤 소설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용은 어떤 사장이 죽은 친구의 딸을 데려다 길렀는데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그런 소설의 이야기이었다. 그런데 이 소위가 어떤 말을 하느냐면 자기는 이 사장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이 친구의 딸과 결혼을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본인은 놀라서 그건 안 된다고 하였더니 이 소위가 하는 말이 ‘사랑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본인은 그렇게 되면 세상은 온통 불의천지가 될 것이라고 하였더니 소위는 또 한 번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사랑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그와 헤어져 저녁노을을 쳐다보며- 시골 길을 걸으면서 도대체 이 순진한 소위가 틀렸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도대체 옳고 그름은 누가 무엇이 정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던 중“나야”하는 어떤 소리를 마음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놀라서 이“나야”가 누구인지를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차츰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이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철학책들을 읽어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똑같이 이 [존재]를 다른 입장에서-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하이데거였다.
최근 하이데거가 추구하려 했던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다시 공부하여 정리를 하여 보았다. 그가 말하고 싶어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보았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의 존재자들(=존재사물들)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해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가 나오는데 즉 이 존재이해가 어느 존재에 대한 이해이냐의 문제이다. 그런데 전기와 후기의 하이데거가 있는데 전기의 하이데거는“이 존재”가 인간 현존재[나]에서 나온다고 주장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나오는 현장의 그림을 찬란하게 그렸다. 이 존재가 인간 현존재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진화론 비슷하여 얼마나 인기가 있었을 지는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후기(1930년 이후)에 가서 슬며시 이 만들어 진다는- 주장을 중단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어쨌든 존재하고 있는 이 존재가 갖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쪽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젊은 시절 중세의 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의 철학사상에 대해서 특별히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분의 학설이 어느 분야에서 유명하느냐면, 인간에게는 신과 인간에 일의적(一義的)으로 통하는 예지(sapientia) 개념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이론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신을 논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상은 당연히 인간에게는 신과 인간에 두루 통하는 어떤 존재에 대한 존재이해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니 하이데거가 이 존재를 찾아 나선 것은 당연할 듯하다.
그런데 이 찾아나서기가 하이데거만의 관심사일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같이 찾아보자는 것이 본인의 이 씀의 목적이 되겠다.
[하이데거를 연구하는 분들을 위하여 맨 뒤에 둔스 스코투스의 有의 一義性(univocitas entis)에 대해서 정의채 교수 서술 부분을 옮겨 놓았음. (중세철학사 정의채김규영 씀. 지학사, 1985년도판, p.287)]
임 창 선
1941년 서울 회기동 출생
1959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1965년 서울 치과대학교 졸업
1965~1968 강원도 원통, 춘천, 속초에서 군생활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 44-3 레이크팰리스
상가 A동 305 치과 근무중
본 글은 로고스가 무엇이고 어떠한 것인지를 체험적으로 밝혀보려고 노력해 본 글입니다.
본인은 사춘기때 병약함에 시달렸고 또 많은 사람들처럼 철학적 회의에 시달렸었습니다. 치과를 전공한 후 군대에 입대하여서는 전방에 고립되어 소외된 기분 속에서 인간 속에 어떤 제3의 존재가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학생시절에는 하늘의 이끌림에 의해서 종교적인 체험도 조금 갖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인간에서 당위를 결정하는 것, 선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저녁 노을의 들판길을 걷다가 내 속에서 그것은“나야”하는 어떤 조그만 목소리를 마음속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존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추구하고 그 존재의 착함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차츰차츰 밝혀 보는데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 속의 절대 선(善)인 Logos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 절대 선(善)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보고 싶은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로고스가 어떠한 것인지가 이해되어야 인간 속의 존재이해도 가능하게 되고, 인식론의 이해도 가능하게 되며, 해석학과 현상학도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게 되리라고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 로고스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로고스를 직접 만나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떤 극한 상항에 떨어져서 절망하여 자아를 움켜잡고 있던 손을 놓게 되는 상항이 발생해야 되고, 그렇게 되면 저절로 자애의 꺼풀이 벗겨지면서 바로 눈 앞에 -그 동안 떨고 서 있던-“너”가 보여지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여 보려고 애써 본 글입니다.
2015. 7. 1.
- 이상 블로그“임창선의 철학 노트” 중의 일부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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