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엄을 바탕으로 성종과 상종을 겸수한다. 또한 원효의 화쟁 사상을 받아들여 유가, 도가와 회통한다. 실제 의천은 원효의 화쟁 사상을 가장 높게 평가했다. 그에게 법상종과 천태종은 원효의 화쟁 사상보다 낮은 위치를 차지했다.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불교계도 큰 변화를 겪었다. 당시 천태지의 사상 자체가 실천적 면이 강했지만 요세는 그 가운데 대중에 다가서는 수행법을 강조했다. 즉 불교가 점차 대중에 가깝게 자리 잡아 대중 속에서 함께 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고려 지눌은 선교일치를 위한 불교를 위해 의상대사의 <법성게>를 예로 들었다. 지눌은 법상게를 진실한 성품은 연기함에 장애가 없음을 밝히는 전수문을 들었다. 이는 특히 원교에서 주로 발휘되었는데 원교에서 말하는 연ㄱ는 성기와 같았다. 즉 지눌의 선교일치는 선종 일방과 교종 가운데 화엄종과 일치한다.
지눌은 우리 인간은 자기 마음에 본각적 입장에서 불성인 자성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자성은 심성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심이 망심 때문에 자심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 인간의 자심은 자기 내부의 불성으로만 자성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가령 자신은 자성으로 내부의 불성을 알 수 있으므로 이를 위해 스스로 정진하고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인간은 개개인이 가진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자성을 가졌으며 이는 중생의 보편적이며 본래적 특징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성의 근원을 물을 수도 짐작할 수도 없다. 그만큼 자성은 근원적이고 본각적인 특성을 지녔다.
지눌은 여러 사상가 중에서도 특히 지(知)를 선택해 자기 사상에 주체적인 이론으로 수요했다. 이는 지눌이 선택한 원칙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현상계의 원인으로 본체계에서는 전혀 배려 대상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눌에게 자심은 ‘그냥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자심에 대해 우리 모두는 그 근원을 짐작하기 어렵지만 지눌의 자심은 우리를 넘어서서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있는 존이다. 결과적으로 지눌의 자심에 대한 경해는 본래적 특징을 지닌 공적 영지이며 이는 나를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현존하는 것들의 공통된 성질로 존재한다. 따라서 자심의 시원을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눌의 자성은 그냥 자기로부터 유래한 성이며 동시에 자기를 넘어서는 성이다. 그렇지만 지눌의 성은 존재 자체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 즉 그냥 있는 것이다.
지눌의 자심처럼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그냥 있는 것은 서양의 형이상학에서도 종종 보여지는 개념이다. 일종의 이데아의 위치에 놓인 본래적 존재로 이는 현상계에서 논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다. 하지만 그 근원적 존재를 배제하고서는 현상의 존재를 논할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현상계에서 살아가지만 근원적 가치가 다다르려고 항상 노력한다. 하지만 근원적 가치를 구체적으로 물으면 딱히 답변할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원적 가치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불교의 화엄의 세계관과 본래적 자심을 밝히기 위해 불성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불교의 가르침을 넘어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라 생각한다.
고려 지눌은 선교일치를 위한 불교를 위해 의상대사의 <법성게>를 예로 들었다. 지눌은 법상게를 진실한 성품은 연기함에 장애가 없음을 밝히는 전수문을 들었다. 이는 특히 원교에서 주로 발휘되었는데 원교에서 말하는 연ㄱ는 성기와 같았다. 즉 지눌의 선교일치는 선종 일방과 교종 가운데 화엄종과 일치한다.
지눌은 우리 인간은 자기 마음에 본각적 입장에서 불성인 자성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자성은 심성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심이 망심 때문에 자심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 인간의 자심은 자기 내부의 불성으로만 자성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가령 자신은 자성으로 내부의 불성을 알 수 있으므로 이를 위해 스스로 정진하고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인간은 개개인이 가진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자성을 가졌으며 이는 중생의 보편적이며 본래적 특징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성의 근원을 물을 수도 짐작할 수도 없다. 그만큼 자성은 근원적이고 본각적인 특성을 지녔다.
지눌은 여러 사상가 중에서도 특히 지(知)를 선택해 자기 사상에 주체적인 이론으로 수요했다. 이는 지눌이 선택한 원칙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현상계의 원인으로 본체계에서는 전혀 배려 대상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눌에게 자심은 ‘그냥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자심에 대해 우리 모두는 그 근원을 짐작하기 어렵지만 지눌의 자심은 우리를 넘어서서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있는 존이다. 결과적으로 지눌의 자심에 대한 경해는 본래적 특징을 지닌 공적 영지이며 이는 나를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현존하는 것들의 공통된 성질로 존재한다. 따라서 자심의 시원을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눌의 자성은 그냥 자기로부터 유래한 성이며 동시에 자기를 넘어서는 성이다. 그렇지만 지눌의 성은 존재 자체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 즉 그냥 있는 것이다.
지눌의 자심처럼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그냥 있는 것은 서양의 형이상학에서도 종종 보여지는 개념이다. 일종의 이데아의 위치에 놓인 본래적 존재로 이는 현상계에서 논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다. 하지만 그 근원적 존재를 배제하고서는 현상의 존재를 논할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현상계에서 살아가지만 근원적 가치가 다다르려고 항상 노력한다. 하지만 근원적 가치를 구체적으로 물으면 딱히 답변할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원적 가치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불교의 화엄의 세계관과 본래적 자심을 밝히기 위해 불성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불교의 가르침을 넘어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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