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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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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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것을 알고는 무력으로 침략자를 물리쳐 국권을 수호하자는 의병항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위정척사론자들이라 하여 결코 세계 조류에 둔감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열강이 각축하는 근대 세계 질서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주의 열강이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이유를 정확히 간파하여, 그러한 압력에 못 이겨 통상개국을 하였을 때의 부작용을 나름대로 예측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국주의 열강과의 통상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제국주의 열강이 오히려 중화적 인륜질서에 편승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태도를 보면 위정척사론자들이 수용과 배척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을 단순히 배타적 국수주의라고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위정척사론자들은 단순히 척사, 즉 천주교를 사교시(邪敎視)하는 문화적 위기에 머무르지 않고, 이러한 천주교의 사교시가 조선조의 존립기반 그 자체에 관련되는 정치질서의 위기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척사의 논리가 반종교적 성격에 그치지 않고, 척양척왜(斥洋斥倭)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반침략적 성격을 띠게 되어다. 그리하여 1860년 이후는 반침략, 민족적 생존의식이 더욱 구체화되어 일종의 경제적 자립의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변천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있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통상개국의 요구에 대한 주체적 항거라는 측면에서 전통 윤리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위정척사론은 위정척사라는 테두리 안에서 아무리 자기변천을 한다고 하더라도 정치사상으로서는 결국 동일차원 속을 맴돌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궁극적 원인은 위정척사론이 그 위기의식이나 방어의식을 군사, 경제적인 것에로 전개해 갔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들은 화이의식 즉 중화적 명분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에 더욱 밀착되어 갔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주자학적 사유형태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장래의 커다란 위기를 예측하였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것에 대응할 만한 효과적인 방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다만 쇄국양이(鎖國攘夷)를 강조하는 데 그쳤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위정척사론은 역사적 환경이 바뀜에 따라 강력한 반침략운동을 주도하는 이론적 바탕으로 발전하여 갔지만, 그것이 가지는 제약성도 뚜렷하였다. 그것은 우선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반침략성을 나타내었던 반면, 대내적으로는 아직도 봉건적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보수적 성격을 고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정척사론의 주장은 분명 구시대적인 한계가 있었고, 이 사상에는 근대적 민권이나 교육 그리고 언론문제 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민주주의적 국정개혁론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조현규, 『한국전통윤리사상의 이해』, 새문사, 2002. p323~325
<참고문헌>
* 조현규, 『한국전통윤리사상의 이해』, 새문사, 2002.
* 한국철학사연구회 엮음, 『한국철학사사상사』,심산, 2005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 한국사상연구소,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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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3
  • 저작시기201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6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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